매일신문

[송재학의 시와 함께] 별사」/ 권혁웅

향랑각시야, 이가 없으면 잇몸이지만 잇몸이 없으면 사태지만 채석장처럼 든든하게 파먹은 천화의 끝에서 향랑각시야, 내게서 빠르게 몸을 감춘 각시야 순식간에 지나가는 의태부사야 구르는 돌이 바꾸는 그림자거나 나뭇잎 사이로 얼비친 햇살처럼 경사와 각도가 만든 전사물론, 혹은 재게 발을 놀리며 행탁도 꽃신도 없이 사라진 이열종대야 나는 의족처럼 서툰 호모 속, 체절도 관절도 턱이 없어서 겹눈으로도 잡을 수 없는 초서체야 엎질러진 글씨야 위아래가 바뀐 음영의 날들, 쥐오줌처럼 졸아든 날들을 뒤로 한 채 외척도 항렬도 없이 가버린 향랑각시야 속거천리야

향랑각시는 노래기이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습기를 좋아하는 절지동물 노래기를 따라가본다. 옛책에서 노래기는 '노략이' '놀여기' 등으로 불렸고, '마륙' '마현' '망나니' '백족충' '장지네' '향랑각시' '환충' 따위의 잡다한 이름도 얻었다. 백족이니 지네니 환충이니 하는 것은 죄다 많은 매듭에서 나온 이름이거니와 노래기에 향낭각시란 별칭을 부여한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향랑각시 속거천리'란 "향랑각시야 빨리 천리 밖으로 도망가라"라는 노래기 부적이다. "노래기 회도 먹겠다"란 속담도 있다. 노래기는 우리 생활 곳곳을 고약하고 난처하게 만든다. 노래기 부적은 붉은 색이 아니라 특이하게 검은 색 묵서이다. 시는 '향랑각시 속거천리'를 배경으로 노래기의 재재빠른 움직임을 모방하는 언어들의 발화가 전면에 돌출되어 있다. 노래기는 우리 말의 부사처럼 다른 사물에 의지한다. 의태부사란 말은 그렇게 생성되었다. 그러니까 이곳 저곳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 자그마한 벌레에 대한 천착은 기실 언어에 대한 천착에 다름 아니다. 그 언어의 밑그림은 우리의 옛 살림이다. 노래기가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시나브로 소멸되어가는 옛 살림의 흔적들이 노래기가 재재바르게 간섭하며 우리에게 넘겨준 냄새이다. 그 냄새가 정다운 것은 사라져가는 시간에의 아쉬움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정서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아주 날렵한 말의 속도 역시 노래기의 행태와 닮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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