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순재의 여담女談] '내조'라는 이름으로

'내조의 여왕'이란 드라마가 주부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과거와 현재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뀐 두 여고동창생의 심리묘사가 웃음을 자아내고 남편을 둘러싼 여자들의 미묘한 심리전도 흥미롭다. 남편을 위해서라면 친구 앞이라도 서슴없이 무릎을 꿇는 내조의 끝모를 행태와 그 속에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들의 반응들이 재미있다. 내조에 목숨 거는 여성들을 향해 깔깔대며 웃어주는 즐거움도 괜찮다. 이런 아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을 받는지 남자들에게도 이 드라마는 인기라고 한다.

사실 내조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주제다. 보기에 따라서는 생뚱맞기도 하다. 그리고 내조는 본질적으로 여성을 불편하게 하는 속성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하고 때로는 자신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낡은 소재에다 불편함까지 주는 이 드라마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면 내조의 미덕은 아직도 유효한 듯하다.

극중의 김남주나 이혜영보다 내조의 여왕다운 아우라가 느껴지는 이가 최근 등장했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다. 그녀의 남편에 의하면 '그녀는 남편 모르게 10억원을 꿀꺽하면서 자신에게 한 마디도 알리지도 않은 아내'였다. 이렇게 간 큰 주부가 있겠는가. 공돈 10만원이 생겨도 남편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내의 생리다. 참으로 비겁한 남편이다. 남편의 비겁한 소리를 "네 그렇습니다"며 고스란히 떠안고 가는 그녀의 모습은 내조의 여왕으로 손색이 없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나 보고 있기에 참 그렇다. 이렇듯 내조의 길은 멀고 험한 듯하다.

내조라면 역대 대구시장 부인들의 내조도 보통이 아니었다. 대개 그들은 자신의 색깔을 죽이고 남편의 요구에 따랐다. 부인이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이런저런 소문이 나는 것을 아주 싫어한 모 시장은 부인을 활동조차 못하게 했다. 그래서 그녀는 믿을 만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만나지도 않고 나서지도 않았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사람을 보는 눈이 비교적 정확했으며 차분했다. 얼마든지 시장 부인으로서 나름대로 활동을 통해 내조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뜻에 따라 '그림자 역할'을 자처했다.

'내조'의 사전적 의미는 아내가 남편을 돕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사랑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희생과 억압이라는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내조라는 말대신 '멘토'라는 말을 사용하면 어떨까.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길잡이가 되고 후원자가 되어 준다는 의미다. 내조라는 이름으로 아내를 힘들게 하고 가끔은 어처구니없는 일까지도 요구하는 비겁한 남편들이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sj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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