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구두 사달라던 생떼를 받아주신 아버지

온통 봄꽃이 지천이다. 갓 피는 꽃, 한창인 꽃, 지는 꽃, 말없이 예쁜 얼굴을 언제까지나 보여줄 듯 믿음직스럽게 있어 준다. 그러나 잠깐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다시 보면 어느새 꽃잎은 지고 생채기가 난 꽃잎들이 땅에 뒹굴고 있다.

나의 아버지도 언제까지도 계실 듯했다. 그래서 나는 나와 내 가족들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게 죄가 그리도 깊었는지 아버지는 꽃잎처럼 갑자기 멀고 먼 곳으로 떠나셨다. 불러도 대답이 없고 이름도 불러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켜켜이 쌓여갈 때, 유품 중에서 사진 한 장을 찾아내었다.

구두를 신고 고집쟁이처럼 입을 꼭 다물고 서 있는 여자애와 아버지. 아마 내 초등학교 첫 봄 소풍인 것 같았다. 당시는 가족 간의 여행이 별로 없던 때여서 학교에서 가는 소풍은 아주 큰 기쁨이었다. 첫 봄 소풍 며칠전이었다. 그 때 부자라고 잘난 척 하는 애가 대뜸 "우리 엄마가 봄 소풍 갈 때 예쁜 구두 사준다 캤다. 너거는 구두 못 신어봤제?" 자랑을 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와 안 신어봤겠노. 우리 아버지가 소풍갈 때 신으라고 사주셔서 집에 두고 왔구마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주위 친구들은 좋겠다며 부러워했다. 나는 내 입을 때리고 싶었다. 있지도 않은 구두를,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꿈도 못 꿀 구두를 집에 있다고 했으니. 나는 집에 오자마자 구두를 사달라고 졸라댔다.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미워 울고 또 울었다. 소풍 전날까지 구두를 사주지 않자 소풍을 안 가겠다고 버텼다. 모녀가 벌이는 전쟁을 며칠간 지켜 보시던 아버지가 아무 말씀 없이 밖으로 나가셨다. 그렇게 나가신 아버지는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시지 않았고 나는 구두 하나 사주지 않는 엄마가 미워 일찌감치 잠자리에 누워 자는 척 했다. 밤늦은 시간에 아버지가 돌아오셨고 손에는 예쁜 빨간 구두가 들려 있었다. 돈이 없어 옆집에서 빌린 얘기와 읍내에서 구두를 사고 나니 버스가 끊겨 십리 길을 걸어오신 이야기를 엄마와 두런두런 주고받으셨다. 나의 거짓말로 아버지를 힘들게 했다는 생각은 아주 잠시였고 친구들에게 뽐낼 수 있어 벌떡 일어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날 밤은 무지 길었다. 새벽같이 일어난 나에게 아버지는 구두를 신겨 주시며 말씀하셨다. "소풍가서 재밌게 놀다 온나." 그 이후 내 생애 많은 소풍이 있었지만 그 해의 봄 소풍만은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버팀목 사랑과 함께 했으니. 아버지, 아버지도 그 봄 소풍을 기억하세요?

박정숙(대구 수성구 범어 1동)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