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백두를 가다](17)청송의 정신·역사문화 바로알기

▲ 항일 의병 정신은 바로 청송의 정신이다. 청송인들은 지금 청송의 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널리 알리고 있다. 이를 위해 청송은 주왕산 입구에 터를 잡아 항일의병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있고, 8월 말 준공이 되면 현재 기념공원 인근 부강서당에 마련한 의병 위패를 옮겨 모실 계획이다.
▲ 청송읍을 가로지르는 용전천은 구한말 청송 의병들의 훈련장이었다.
▲ 항일 의병 정신은 바로 청송의 정신이다. 청송인들은 지금 청송의 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널리 알리고 있다. 이를 위해 청송은 주왕산 입구에 터를 잡아 항일의병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있고, 8월 말 준공이 되면 현재 기념공원 인근 부강서당에 마련한 의병 위패를 옮겨 모실 계획이다.
▲ 청송읍을 가로지르는 용전천은 구한말 청송 의병들의 훈련장이었다.

주왕산 역사바로세우기를 마친 일행은 이제 청송 역사바로알기를 시작했다. 그 출발점이자 핵심이 있는 주왕산 입구의 '화전등'으로 향했다. 항일의병기념공원 조성사업 공사가 한창이었다. 전통양식의 건물이 그 위용을 드러냈고, 8월 말 준공을 목표로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었다. 바로 '청송의 정신'을 세우고 기리는 역사의 현장이다.

청송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은? 이구동성 수준으로 '사과'라고 할 것이다. 반면 "청송의 역사·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나요?"를 물으면? 대답은 '글쎄'라고 할 것이다.

일행이 청송을 알아갈수록 숨겨진 청송의 역사·문화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청송인들이 청송의 정신인 항일 의병 정신을 기리고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청송인들은 물질만능시대에 정신문화의 가치가 더욱 소중한 이 때에 의병 정신을 청송을 넘어 한국의 정신으로 계승시키고 있었다.

병신창의 청송선열유족회 서점 회장은 청송 의병사는 "400년 역사이며 청송의 유림들이 유교 문화의 전통 정신을 실천한 것"라고 했다. 서 회장은 "청송인들은 인예의지(仁禮義智)를 실천하고 나라가 어려울 때 분연히 일어난 진정한 선비"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 각 문중의 선비들이 군자금과 병사를 모아 홍의장군 곽재우 의진, 영천의 권응수 의진 등 영남의 주요 의진에 참여해 호국의 의지를 불태웠고, 병자호란 때도 의병 활동을 통해 국권 수호에 나섰다.

청송의 정신이 가장 분연한 때는 바로 구한 말 일제에 항거한 의병활동. 14년 전인 1995년 8월 '적원일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896년 병신년 청송 지방에서 마지막까지 일본군과 항전했던 청송 의병들의 진중일기로 그 동안 후손들이 간직해 오다가 비로소 세상에 빛을 본 항일 의병사의 중요한 사료이다. 대장 심성지, 의영도지휘사 서효원 등 청송의 유생이 중심이 돼 농민, 보부상 등 180여 명이 혼연일체로 일제에 맞선 것이다. 특히 적원일기는 개인문집이 아닌 공식 진중일기이다. 또 구한말 의병 병제를 소상히 기록했을 뿐 아니라 청송유림의 학풍과 학맥, 보부상과 농민들의 역할까지도 소상히 기록돼 있다. 또 이웃 진보의진의 활동기록도 적혀 있어 학계에선 중요한 항일 의병사 자료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청송은 지금까지 국가로부터 서훈받은 의병부문 건국 유공자가 87명(전국 1천897명)으로 전국의 시·군 중 가장 많다.

강병극 청송군 전략기획팀장은 "청송의진은 당시 청송의 인구 규모로 볼 때 경이적인 일로 특정인 주도의 의병이 아닌, 청송의 각 문중과 청송인들이 똘똘 뭉쳐 일제에 항거했다"며 "청송의 선비정신이 얼마나 뜨거웠는 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일행은 청송의 정신을 가슴에 새기며 청송읍내 용전천변에 위치한 옛 관아 객사로 향했다. 객사 앞에는 누각이 하나 있다. 바로 찬경루(讚慶樓)다. 찬경루는 조선 세종 때 군수 하담이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시조묘를 바라보며 "우러러 찬미한다"는 뜻에서 지은 누각이다.

청송은 세조 5년(1459년) 때 세조의 모후인 청송 심씨 소헌왕후의 본향이라는 이유로 도호부로 승격돼 1895년 갑오경장에 의해 청송군으로 개칭되기 이전까지 437년간 경상도 12대 고을, 7대 도호부의 위상을 유지했다. 도호부 승격 당시 청송의 가구 수는 1천여 가구에 불과했다고 한다. 청송 심씨는 조선 10대 명문 중 한 가문이다. 시조인 심원부는 고려 말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함께 충절을 끝까지 지킨 여말오은 중 한 명이다. 청송 심씨는 소헌왕후 등 조선조 때 3명의 왕후와 4명의 부마를 배출했고, 영의정 9명 등 대과급제자만 188명이나 된다. 작은 고을 청송의 가문과 학맥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청송은 청송 심씨라는 조선의 큰 가문과 유교 문화의 전통을 이어왔고, 나라가 어려울 때는 선비 정신을 몸소 실천한 충절의 고장이다. 이제 청송 가는 길은 단순히 산수에 아름다움에만 도취되지 말고 청송의 정신과 숨은 역사·문화의 가치도 온몸으로 느껴보는 것이 어떨까.

특별취재팀 이종규기자 청송 김경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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