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배동 남산 자락에 자리잡은 한국화가 소산(小山) 박대성(65)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마냥 설렘이 앞섰다. 전날 굳이 대구로 찾아오겠다는 원로 화백에게 먼 걸음 할 필요없다며 만류한 뒤 기자가 내려가겠다고 고집한 이유는 단순한 배려를 넘어선 욕심 때문. 천년 고도 경주의 영혼과 10년째 호흡하고 있는 소산의 작업실이 궁금했다. 반세기 붓과 함께한 화백은 그 자신이 바로 그림이었다.
소산은 대뜸 "새로운 작품 세계를 맛보게 될 것"이라며 운을 뗐다. 내로라하는 학벌도 없이 자연을 스승 삼아 그림을 배웠지만 1970년대 대한민국 국전을 휩쓸고, 1979년 '상림'으로 대상을 받으며 한국 화단을 들썩이게 했던 소산이 아닌가. 진경산수의 맥을 잇는 작가인 동시에 전통을 추구하며 새로움을 모색하는 수도자적 자세로 이미 자신만의 본류를 만든 화가. 게다가 그리는 그림마다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있는' 작가다. 외국에서도 한국화 대작이 통하는 유일한 작가이며, 외국의 내로라하는 미술관에도 그의 그림이 걸려있다. 지난해 10월 서울옥션의 홍콩세일에서 수묵담채화 '현률'(玄律)은 9천만원 가까운 가격에 팔렸다.
그런 그가 새로운 세계라니. "그간 수많은 작가와 작품에 영향을 받았고, 그에 따라 그림이 조금씩 변했는데 이제 흔들림이 없는 세상을 만난 것 같습니다." 친절하다 싶을 정도로 세밀한 묘사를 통해 실경과 상상을 넘나드는 풍경화의 세계를 구축했던 소산은 과감한 생략과 깊이 있는 농암, 파격적인 구도로 다시 세상과 만나고 있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작업하는지 물었더니 하루 24시간도 부족하다며 "24시간"이라고 했다. 그토록 치열하게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묻자 한동안 침묵에 빠져있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타고 났기 때문이겠죠. 아침에 눈을 뜨면 그림을 생각했고 눈이 오건 비가 오건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면 곧장 달려가야 했으니까. "날이 추워 물이 얼면 소주에 물감을 탔고, 영하 20℃가 넘어 소주가 얼면 독주에 물감을 타서 그림을 그렸다.
1949년 여름의 어느 끔찍한 밤, 소산이 5살 때 일이다. 공비(소산의 표현을 빌리자면)가 휘두른 낫에 부모가 살해되고 5살 어린 아이는 왼손을 잃었다. "두 손이 멀쩡했다면 성격상 방에 틀어박혀서 그림만 그리지 못하지. 밖에 나가면 놀리니까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린 거야." 제대로 된 선생도 없이 자연을 벗 삼아 스승 삼아 그림에 매진했다. 그렇게 흐른 세월이 반세기에 접어든다.
늘 그랬지만 이번에 선보이는 소산의 작품에도 힘이 넘쳐난다. 먹을 적신 붓으로 종이에 그린 그림이 아니라 금강석을 들고 바위에 쪼아대듯 획마다 아찔한 전율이 느껴진다. 화폭의 아래쪽 가운데에서 윗쪽 가장자리로 퍼져가는 듯 부채살 모양의 구도도 새롭다. 가로 길이만 4m50cm에 이르는 대작 '현향'(玄響)은 크기 때문이 아니라 솟구치는 힘과 박력 때문에 보는 이를 주눅 들게 한다.
도자기를 그린 작품은 유화의 깊이를 넘어섰다. 마치 실제 거대한 도자기를 전시해 놓은 듯 생동감이 넘쳐난다. 그의 작품은 멀리서 봐야 한다. 그럴수록 더욱 명징하게 다가온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틈틈이 습작한 스케치도 수십 점 선보인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관 초대전으로 열리는 '소산 박대성'의 개인전은 6월30일까지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문화센터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