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5일장의 풍경은 도시의 시장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5일장'이란 단어만으로도 한국인의 뼈 속 깊이 숨어있던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대구와 40분 거리의 영천 5일장을 찾아봤다. 영천 5일장은 2,7일 장으로 안동장'대구약령시장과 함께 경상도 3대 시장으로 꼽힐 정도의 명성을 가진 곳이다. 그 때문에 '잘 가는 말도 영천장, 못 가는 말도 영천장'이란 말이 생겨났다. 인근 마을에서 아무리 빨리 가도 영천장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는 뜻이란다. 영천은 대구'경주'포항'안동으로 통하는 도시로 교통의 요지에 있기 때문에 동해안과 내륙의 물품들이 영천장을 통해 교류됐다.
12일 오전 10시. 영천 5일장이 열리는 영천공설시장 앞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라고 생각했음에도 벌써 장보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정류장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할머니'할아버지의 손에는 무거운 보따리들이 들려 있다. 비닐에 각종 모종을 사가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정겹다.
영천 5일장 투어는 공설시장 바깥쪽으로 형성된 난전 구경에서부터 시작된다. 난전에는 용돈벌이로 작은 보따리를 들고 나온 할머니들부터 5일장마다 돌아다니는 전문 장꾼들까지, 구경거리가 제법 쏠쏠하다. 경주에서 직접 채취한 도토리로 묵을 쒀 영천장날마다 나오시는 한 할머니(77)는 "비가 안와서 꿀밤나무가 죄다 말라버려서 큰 일"이라며 걱정을 하신다. "도토리묵을 좀 싸게 주고 싶어도 워낙 가물어서 꿀밤나무가 있어야 말이지. 올 가을에는 특히나 걱정이야." 할머니의 묵을 먹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손님들은 복잡한 길거리에 그냥 퍼질러 앉아 묵 한 그릇에 양념장을 올려 군입거리로 삼는다.
시장 안쪽으로는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시장 풍경이 펼쳐진다. 2004년 현대화작업을 거친 영천시장은 1~4지구로 구획이 나누어져 있다. 1지구는 곡물류, 2지구는 곰탕 골목, 3지구는 잡화, 4지구는 신발, 의류 등이 몰려 있어 종목별로 구경할 수 있다. 우선 시장 바깥에 형성된 난전들을 구경한 후 시장 안을 구획에 따라 구경하면 된다.
특히 영천 장날의 먹을거리 골목은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떡볶이'튀김'순대 등을 파는 분식점, 죽집, 곰탕 골목 등은 이미 오래 전에 형성됐다. 이 가운데 영천 5일장의 명물은 소머리 곰탕이다. 소 뼈와 고기를 넣어 푹 고아서 내는 소머리 곰탕은 번성하던 영천 우시장의 영향으로 특화됐다.
국밥집 앞에서 이것저것 물어보자 곰탕 장사 6년차 이정자(47)씨는 "왜요, 장사 한번 해보시게요?"하면서도 경계심 없이 이것저것 일러준다.
씨앗을 팔러 나온 할머니는 색이 고운 꽃상추, 배추 등의 씨앗 한 줌씩 내다놓고 판다. 짚으로 각종 공예품을 만들어 내다파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분주하다.
영천장에서 빼놓지 말고 꼭 가봐야 할 곳은 돔배기 골목. 상어 고기를 소금에 절여 2~3개월 숙성시켜 만든 '돔배기'는 영천의 특산물이다. 영천 시장에는 돔배기를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가 약 25곳이 있다. 영천시에 따르면 영천 재래시장에서는 전국 시장 규모의 50% 정도인 연간 500여t의 돔배기가 판매된다. 돔배기가 웰빙 음식으로 인기를 끌면서 전국 돔배기 시장 규모는 500억원대라고 한다.
돔배기는 '간을 친 토막 낸 상어고기'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로 구이와 산적 그리고 조림에 이용한다. 먼 옛날 동해안에서 잡은 상어를 영천으로 옮기기 전에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발달한 갈무리법과 염장기술이 그 기원이다. 콜라겐'펩타이드 성분이 많아 성인병에도 좋은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을 둘러보고 나오자 한여름을 앞두고 버스정류장에서 1천원짜리 밀짚 모자를 파는 장사꾼의 상술이 재미있다. "대한민국에서 나 혼자 독점판매 하는 거 아입니꺼. 비가 와서 빨리 털고 갈라고 하나 천원에 팝니다." 너스레를 떠는 아저씨에게서 못이기는 척 1천원짜리 모자를 하나 사든다.
대구에서 40여분, 짧은 시간에 전혀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마음의 때를 한꺼풀 벗었다. 오래된 고향냄새를 맡는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장날 구경 이렇게
영천장은 2,7일장이다. 대구와 가까운 경북에도 제법 큰 규모의 5일장이 열리는 곳이 많다.
영천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55번, 555번이 있다. 동부정류장에서 하양 금호를 거쳐 영천에 도착한다. 동부정류장과 용계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영천 직행버스도 10여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3천100원.
전국5일장연합회(www.koreajang.net)를 활용하면 장날이 언제인지 알 수 있다. 경북 주요 장의 날짜는 경산장(5, 10)'자인장(3, 8)'감포장(3, 8)'건천장(5, 10)'지례장(4, 9)'문경장(2, 7)'상주장(2, 7)'영주장(5, 10)'풍기장(3, 8)'의성장(2, 7)'옥산장(3, 8)'구룡포장(3, 8)'죽장장(3, 8).
◇40여년 곰탕집 맥 잇는 임순자씨
● "젊은 사람들도 일부러 찾아와요"
영천시장 안에는 곰탕 골목이 있다. 이곳에 가면 커다란 가마솥에 24시간 소뼈를 고아내 만드는 영천장의 명물 소머리 곰탕집 10여곳이 밀집해 있다. 산성식당 임순자(56)씨는 대를 이어 40여년째 소머리 곰탕집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영천 우시장이 원래 전국 규모로 크잖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천 5일장에서 소머리곰탕이 명물이 된 것 같아요." 소머리곰탕은 각종 소의 뼈와 족발, 내장 등을 삶아내 뽀얀 국물을 내고 여기다 소고기를 부위별로 저며 넣어 한 그릇을 완성한다. 이렇게 만든 곰탕은 쫄깃한 고기와 담백한 국물맛이 특징. 임씨는 '2007 서울국제음식산업박람회'에 출품, 동상을 받기도 했다.
소머리 곰탕(5천원) 뿐만 아니라 이 골목에선 소고기 수육, 돼지곰탕(4천원), 돼지고기 수육, 순대국밥(4천원), 선지국밥(4천원) 등 다양한 메뉴를 만날 수 있다. 임씨는 "최근엔 젊은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올 정도로 고객층도 다양해지고 널리 알려졌다"고 말했다.
◇26년째 돔배기 판매 이경례씨
● "단골 입맛 까다로워 최상급 취급"
"수십 년째 단골을 상대로 장사하다 보니 좋은 고기가 아니면 팔 수가 없죠."
26년째 영천 돔배기를 판매하고 있는 희재어물 이경례(48)씨는 영천 돔배기 시장의 장점이 '단골장사'라고 단언했다. 돔배기를 제사상에 올리는 풍습 때문에 영천 5일장엔 돔배기 장사가 빠질 수가 없다. 지금 돔배기 골목에는 약 25곳이 성업 중이다.
"사실 가게마다 특별한 맛의 차이는 없을 거예요. 단지 고객 식성에 따라 소금을 더 많이 치거나 적게 칠 뿐이죠. 단골 식성까지 다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사가는 사람마다 맛이 다를 겁니다."
젊은 사람들은 담백한 맛의 모노 상어를 좋아한다. 반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상어고기 특유의 냄새가 좀 더 강하고 씹는 맛이 있는 귀상어를 찾는다.
영천 5일장이 돔배기로 유명해진 데에는 고객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한몫 한다. 외지인들이야 돔배기 맛을 잘 모르지만 돔배기를 자주 즐기는 영천 사람들은 좋은 고기인지 아닌지 금세 알아차리기 때문에 언제나 최상급 고기를 취급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요즘은 택배를 통해 돔배기가 전국으로 배달된다.
최세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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