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개혁과 신영철 대법관
어릴 적 누군가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판검사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도 그와 비슷한 질문을 받고 그렇게 모범적인(?) 답을 했더니, 마침 서울에서 식모 살다가 와서 세상 인심을 제법 깨친 이웃집 누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얘! 그건 가난한 시골 수재가 일확출세를 노리는 거래. 그리고 사시 패스하면 뒷바라지하던 여자를 버리고 부잣집 딸에게 장가를 가기도 한대…." 나는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그 후로는 그런 식의 질문이 나오면 '출세를 하고 싶은 가난한 시골 소년'이라는 게 탄로날까봐, 좀 고상해 보이는 '시인이 되겠다'고 말한 기억이 있다.
실제로 판검사 되는 사법시험을 주로 가난한 시골 수재가 보았는지, 또 사시 패스하면 애인을 버리는 비정한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난 1960, 70년대 사시에 대한 세간의 인식에는 일부 그런 신파극 같은 정서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가난한 시골 청년의 출세 코스로 '개천에서 용 나게 하던' 사법시험에도 이제는 가정 형편이 좋은 서울 강남 출신 자녀들이 더 많이 붙고, 법관이라는 전문직도 점차 세습되는 경향을 띠고 있다고 한다.
뮤지컬로도 유명한 '시카고'라는 영화를 보면 '빌리 플린'이라는 변호사가 나온다. 그는 돈만 아는 이기적인 변호사로 묘사되는데 살인범인 여주인공 '록시 하트'에게 5천 달러를 받고 그를 무죄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살인범을 무죄로 만드는 그의 기술(?)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그는 변론과정에서 "재판이나 세상이나 모두 쇼 비즈니스지"라고 말한다.
나는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처럼 법관이라면 마땅히 정의와 양심을 지켜주고 특히 사회적 약자들의 친절한 벗일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실제로 내가 아는 주변의 몇몇 법조인은 직업인으로서 자질도 뛰어나고 훌륭한 인품까지 갖추고 있어 나의 이런 생각을 더욱 굳혀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 신영철 대법관 파동을 지켜보면서 그 분야에 관련된 자료나 책을 읽어 보았더니 법관에 대한 세상의 인심이 나와는 사뭇 다르다는 데 놀랐다. 19일자 모 일간지에 실린 한 저명한 근현대사 학자의 글에서는 '유신과 5공의 사법부에 벼락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그래도 사법부에 의로운 법관이 몇 분 계셨기 때문'이라는 혹평을 가하고 있었다.
지난 70년대 발생했던 인혁당 사건은 대구가 본거지인데 당시 이미 부당한 사법살인으로 세계적인 악명을 떨쳤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최근 무죄로 다시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뿐 아니라 우리 현대사에 일어났던 숱한 간첩 조작사건과 시국사건 등에서 사법부는 '정의와 양심의 보루'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부도덕한 권력 앞에 떳떳하지 못한 어두운 과거를 많이 안고 있었다.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의 김두식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불멸의 신성가족'이라는 책은 판검사를 비롯한 법원 주변의 법 관련자들이 국민을 어떻게 괴롭히고 골탕먹여 왔는지, 그 바닥이 얼마나 부패한 곳인지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이다. 오죽했으면 책 제목이 '불멸의 신성가족'일까?
역시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2003년에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우리나라 판사가 청렴하고 유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 '매우 그렇다'가 0.3%, '그렇다'가 33.7%, '아니다'가 55.7%, '전혀 아니다'가 6.1%로 나왔다고 한다. 판사의 청렴성이나 능력에 대해 국민의 절반 이상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제가 된 신영철 대법관은 촛불시위 관련 재판에서 특정 성향, 다시 말해 보수적인 성향의 판사에게 몰아주기 식으로 재판을 배당했다. 그리고 집시법에 대한 위헌제청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행법에 따라 신속히 재판하라고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사법부는 양심과 법률에 따라 재판할 때만 그 판결이 의미 있고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이번 사태가 법조계의 제도적 결함의 노출이라는 시각도 많다. 신영철 대법관은 용퇴를 해야하고, 법조계는 이번 사건을 자기 정화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시인.경북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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