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재상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거리를 '약전골목'이라 부른다.
대구의 약령시(藥令市)는 널리 알려진 약재시장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자그마치 350여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가운데는 3대를 이어온 한약방이 수두룩하다. 처음에는 경상감영 안 객사(지금의 경북인쇄소 동편) 마당에 있었으나 객사가 헐리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앉았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남성로에 해당된다.
약령시는 조선조 효종(1650~1659) 때부터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열렸다. 약재가 주로 봄가을에 수확되기 때문에 춘령시(春令市)와 추령시(秋令市)로 나뉘어 열렸고, 약재를 사 모으는 일이 국가의 중요한 사업이라 관찰사가 맡아서 감독했었다.
'영 바람 쐰다'는 말이 있었다. 전국의 약령시를 한바퀴 돌아보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대구 영 바람' 안 쐬면 약효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구 약령시가 유명했었다. 심지어 이북의 원산이나 함흥에서 생산된 약재를 대구 약령시에 내놓았다가 다시 생산지로 실어 나가기도 했었다. 그때 그 시절 각지에서 모여드는 구매상이 1만명을 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약전골목과 종로가 만나는 네거리에 '영남제일관'이 있었다. '영남제일관'은 대구읍성의 남문에 걸었던 편액이다. 네개의 성문 가운데 규모가 제일 컸는데, 그 까닭은 남향을 존중하던 우리 민족의 오랜 관습 때문이었다. 또한 신임 관찰사가 부임할 때는 남문을 거쳐 종로로 입성했다. 그리고 성문을 나서면 남쪽으로 가창과 청도, 북쪽으로 칠곡과 문경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가 있었다. 이른바 '과거길'이었다. 오늘날 약전골목 남쪽으로 이어진 '성밖골목'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980년 '영남제일관'을 망우공원에 복원해 놓았다. 대구읍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을 상징적으로 복원한 것 같은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모양과 규모에 대한 고증도 거치지 않았을뿐더러, 역사적 유적이나 유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가치가 있는 법이다. 실제로, 뒷날 발견된 당시의 사진과 대조해 보면 전혀 다른 모양의 건축물이 되고 말았다.
영남제일관이 있었던 인근에 대남한의원이 있었다. 대남한의원은 1935년 파출소 건물로 지어졌다. 당시의 이름은 남정파출소였다. 1945년 여동명이 매입하여 한의원으로 사용하다가 건물의 일부가 불탄 뒤 한 차례 개조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 다시 개조하여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 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의 외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이 건물은 건축학자들이나 답사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2007년 헐리고 말았다.
약전골목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 시절의 명성을 되찾으려는 다양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해마다 축제를 마련,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으고 약령 전시관을 지었으며, 주변 환경도 크게 개선하였다. 바야흐로 웰빙시대다. 다들 잘 먹고 건강하게 살려고 애쓰는 세월에, 특색 있는 거리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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