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의 계절 5월을 넘어 어느새 여름의 초입이다. 산과 들은 눈부신 녹음이 짙어가고 초록 빛깔을 더해가고 있다. 벌써부터 한낮 햇볕이 따갑다. 바쁜 일상의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훌쩍 떠나 보면 어떨까. 산 높고 골 깊어 물이 맑은 경남 함양을 찾았다. 지리산과 덕유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함양은 청정한 숲과 계곡으로 자연이 빚은 풍광이 다채롭다. 거기다 붉은 꽃양귀비축제와 보랏빛 하고초축제 등 이색적인 볼거리가 많아 사람들의 발길을 더욱 당긴다.
◇육감적인 선홍빛 꽃양귀비
지금 함양읍 용평리 한들 지역에는 붉은 꽃양귀비가 지천에 스펙트럼처럼 널려 있다. 국내 최대 규모(100만㎡)의 '함양 한들 플로리아 페스티벌'(5.22~6.10)이 한창이다.
하늘하늘한 줄기에 화사한 꽃양귀비. 따가운 햇살 사이로 뿜어져나오는 선홍빛 꽃양귀비 꽃밭에 들면 화려한 색깔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육감적 색깔에 비해 향기가 없는 꽃양귀비. 향기마저 진하다면 중국의 절세미인 양귀비에 빠져 몰락한 당나라 현종의 처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붉은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꽃양귀비와 하얀 물감을 칠해놓은 듯한 야생초가 어우러져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꽃양귀비 사이사이에 피어난 수선화'금영화'수레국화 등 야생화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다투는 듯 하다. 꽃밭 사이사이의 사람들은 붉은 바다에 빠진 듯 하다. 한눈에 다 볼 수 없는 아득하게 펼쳐진 색의 스펙트럼 앞에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다. 꽃들이 너무 많아 한눈에 다 볼 수 없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꽃뿐만 아니라 토속 민물고기 생태체험관, 철갑상어전시장, 동춘서커스 등 다양한 볼거리도 마련돼 있다. 아쉬운 점이라면 입장료가 다소 비싼 편. 성인 8천원, 청소년 6천원, 어린이 4천원 등이며 행사장내 카트 이용료도 5인 기준 1만5천원이다.
▶가는 길 : 대구~88고속도로~고령~합천~거창~함양~행사장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숲 상림
화려한 꽃양귀비의 자태를 뒤로 하고 천년의 숲 상림(上林)으로 발길을 돌렸다. 상림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는 위천수 냇가에 자리한 방수림. 1천100여년 전 신라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태수로 부임하면서 홍수 피해를 막고자 둑을 쌓고 나무를 심은 것이 지금 숲의 시초.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져 있으며 현재 하림도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수정 같은 계류가 흐르는 숲 입구는 초록의 향연이 한창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초록의 터널을 이루는 숲은 싱그러운 향기가 코를 찌른다. 어른거리는 햇살을 뚫고 숲 안에 들어서면 함양 읍성의 남문이었던 함화루가 눈에 띈다. 홑처마에 팔작지붕, 이층 둘레는 닭볏 난간으로 된 소박한 누각이다.
천년의 세월을 버텨 온 숲 속 나무들은 자라는 형태도 제각각이다. 아예 땅에 드러누웠거나 반쯤 엎드린 게 있는가 하면 밑 둥지가 썩어 커다란 구멍이 생겼음에도 가지는 연록색의 잎을 활짝 피우고 있다.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인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몸통을 합해 하나로 자라는 연리목(連理木)도 있다. 부부 금슬과 남녀 간 깊은 애정을 비유한 연리목은 예부터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왔다. 상림에는 연리목이 두 그루나 자라고 있다.
상림의 길은 약 3㎞로 꽤 길다. 그러나 숲이 선사하는 싱그런 녹음을 자양분으로 삼으면 여행의 피곤함을 떨칠 수 있다. 상림은 비단 숲뿐만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를 선물한다. 함양을 빛낸 11인을 기린 역사인물공원과 너럭바위, 인근 사적지에서 발굴한 고려시대 석불, 물레방아 등이 재현돼 있다.
◇하고초를 아십니까
천년의 세월을 견뎌 온 녹록하지 않은 시간의 상림숲을 뒤로한 채 하고초를 찾아 양천마을(백전면 오천리)로 발길을 돌렸다. 꼴망태 메고 뽑아 먹던 추억의 꿀풀인 '하고초'(夏故草)다. 지리산 자락의 작은 산골마을 들머리에 들어서자 다랑논에 보랏빛의 하고초 향연이 펼쳐진다. 옛 고향의 정겨운 모습과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하듯 그려진다.
전국 유일의 하고초 군락지(11㏊)인 양평마을은 하고초축제(5.22~6.10)로 한창이었다. 하고초는 5월 중순 꽃을 피우기 시작해 여름이 시작되는 6월 말이면 꽃이 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꿀풀'로 불리는 야생화. 올해는 계속된 가뭄으로 예년보다 못하지만 진한 보랏빛 향연에 눈을 뗄 수 없다. 마을 곳곳에는 토종벌을 키우는 데, 벌통 주위에 수많은 벌들이 꿀을 따다 나르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마을 중간엔 수백년은 족히 넘었을 듯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넉넉한 그늘을 내어 주는 이 마을의 당산목이다. 청량한 바람을 쐬며 보랏빛 하고초를 바라보노라면 여행의 피곤함은 저 멀리 달아난다. 갖은 산나물과 하고초를 버무린 비빔밥과 부침개, 하고초 꽃잎을 동동 띄운 동동주 한 사발을 들이켜고 나면 이곳이 신선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마을 주민들이 직접 음식을 날라다 주며 가격은 각각 3천원으로 인심 또한 넉넉하다. 하고초꿀과 엑기스를 시식할 수 있고 현장판매와 인터넷주문 판매도 하고 있다.
◇서암정사
진한 보랏빛 하고초꽃의 여운 때문이었을까. 원래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서암정사를 찾았다. 서암정사는 지리산 칠선계곡 초입의 산 중턱에 자리한 벽송사의 부속 암자다. 서암정사로 가려면 오도재(해발 773m)를 넘어야 한다. 변강쇠와 옹녀가 이 길을 통해 지리산으로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오도재. 함양에서 인월 쪽으로 가다 보면 조동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오도재를 통하면 바로 마천으로 넘어갈 수 있다. S자형의 도로를 굽이치며 올라가다 보면 양쪽의 싱그러운 나무들이 도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 오도재 정상에 오르면 지리산 제일문이 빨리 오라는 듯 손짓한다.
지리산 제일문 위의 누각에 올라서니 청아한 바람에 속세의 묵은 때가 씻겨 나가는 듯하다. 눈 아래 사람들은 작은 티끌처럼 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 오도재 정상에서 마천 방면으로 조금 내려오니 지리산조망공원이 나온다. 이곳에 서니 지리산의 하봉'중봉'천왕봉을 거쳐 세석평원'벽소령'반야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오도재를 넘어 한참을 달려 내려오다 왼쪽으로 들면 우리나라 3대 계곡 중 하나인 칠선계곡이 나온다. 칠선계곡 초입의 산 중턱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벽송사가 나오는데 서암정사는 그 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된다. 서암정사는 벽송사의 전 주지 원응 스님이 1989년부터 시작하여 10년여년에 걸쳐 화엄경 금자사경을 완성하고 주위의 자연석 암반 위에 대방광문(大方廣門'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극락전(極樂殿'아미타여래가 주불이 되어 무수한 불보살이 조각된 부처님의 이상세계 모습), 광명운대(光明雲臺'구름 일 듯이 무수한 불보살이 상주하는 곳), 사자굴(스님들의 수행장소) 등을 조각하고 만들어 그 정교함과 웅장함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특히 석굴법당인 극락전은 압권이다. 장엄하고 상서로운 자연 석벽에 아미타불 지장보살 존상을 비롯해 미타회상의 무수한 불보살을 정교한 조각으로 조성해 영원한 이상세계인 극락정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가는 길 : 함양나들목~2번국도~1023지방도~오도재~서암
전수영기자 poi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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