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은 교활하고 간사한 북곽 선생을 꾸짖는다.
"선비란 놈은 아첨 잘하는 놈[儒者諛也]이라더니 과연 그렇구나. …우리는 적은 놈을 불쌍히 여겨서 살려주는 도량이 있지만, 너희들은 오히려 돈이 있고 권세가 있는 놈들 앞에서는 쩔쩔매고 온갖 아첨을 다하면서도 이와 반대로 저보다 약하고 좀 만만한 놈에게는 함부로 못살게 굴지 않는가. 돈 가진 놈을 조상처럼 위하고, 벼슬 하나 얻어 하기 위해서 제 계집을 바치기까지 하는 놈이 있지 않는가."
단군신화에는 범이 실패자로 등장한다. 건국 이념에서는 곰이 주류를 차지하고 범은 방계로 밀려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는 승리자 곰보다 범이 더 깊고 넓게 자리하고 있다. 단군신화에서 호돌이까지. 범은 무섭고, 용감하고, 인자하고, 착하고, 어리석고…. 이처럼 우리 민족은 범에게 다중적이고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서두에 인용한 연암 박지원의 소설 에서, 범이 꾸짖는 선비 북곽선생은 지식인, 엘리트, 이른바 여론 주도계층, 곧 오늘날 주류 계층의 전형일 것이다. 우리 민족은 범의 아름답고 의젓한 모습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심판자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백수의 왕인 범은 바보스러운 데도 있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에서 범은 순수하고 착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범의 커다란 눈망울, 그 느긋한 모습에서 친근함을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 이미지를 만들었을 것이다. 또 에 실려 있는 라는 설화에는, 신앙심 깊은 암범이 인간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나누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쳐 출세하게 한다. 범은 사랑과 희생, 성스러움의 화신이다. 우리의 범은 이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도 지니고 있다.
범은 천·지·인 모두를 지키는 신령한 존재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도에 있는 범은 하늘의 서쪽을 맡아 지킨다. 신라시대 능묘 호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의 범은 동쪽 땅을 지킨다. 우리의 삶에 사악한 기운은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범은 마침내 산신으로 좌정한다.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범을 산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단군 할아버지는 나라를 지키는 산신이며 범은 그 지역을 지키는 산신이다. 절에 딸린 산신각이나 고개 입구에 있는 산신각, 서낭당에는 어김없이 범을 모셨다. 범은 노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범은 노인이오. 노인은 범이다. 범은 산신의 사자이면서 또 산신 그 자체이다. 길손을 해치던 범이 이제는 길손을 지켜주는 인자한 할아버지 산신, 서낭신이 되어 우리의 수호신으로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추연창 도보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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