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설사문화

어느 사학자는 한국은 받아들인 것을 한 번 쓰고 내버리는 '설사문화'에, 일본은 받아들인 것을 꾹꾹 쌓아 두고 우려먹는 '변비문화'에 비유했다. 비단 문화뿐 아니라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적용해 봐도 틀린 분석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문화의 차이가 두 사회의 아이덴티티와 국가 이미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반추해 볼 말이다.

6'10 민주항쟁 22주년을 맞아 수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반이명박, 반한나라당 정서에 불을 붙였고 시국선언도 잇따랐다. '조문정국'의 만장을 내건 야당과 개혁세력은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거리정치를 하겠다며 몰아붙이고 있다. 지리멸렬한 정부와 여당을 보니 마치 죽은 공명에 쫓겨 산 중달이 혼비백산한 형국이다.

춘추시대 때 노나라 애공을 섬기다 연나라 재상으로 출세한 田饒(전요)의 고사는 이 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애공의 인정을 받지 못한 전요는 "이제 주군을 떠나 황곡(고니)처럼 살겠다"고 말했다. 애공이 영문을 몰라하자 '닭의 다섯 가지 미덕'을 들려주는데 "머리에 갓을 달아 文(문)이고, 날카로운 발톱은 武(무)이며, 적에게 용감하게 달려드니 勇(용)이요, 먹이를 보면 서로 불러 仁(인), 때를 놓치지 않고 우니 信(신)입니다"라며 자기 처지를 빗대 말했다. 주군이 이런 미덕을 몰라주고 매일 닭을 잡아먹고는 멀리서 날아온 황곡만 귀히 여기니 어찌 섬기겠느냐며 떠나 버린다.

지금 한국 정치 현실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다. 이런 미덕조차 갖추지 못했다고 전'현직 대통령을 불신하고 집권당을 내칠 수는 있어도 선거라는 절차와 방법은 엄연히 존재한다. 거리정치가 당장 화풀이는 되겠지만 한 번 쓰고 내버리는 정치문화만 부추길 소지가 많다. 우리 정치가 이리 탈 난 것도, 정치보복을 부를 환경을 만든 것도 설사문화에 익숙한 편협한 정치의식 때문은 아닌가.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할 소리 하는 게 민주사회다. 하지만 감정이 앞서 무조건 판을 뒤엎겠다거나 민의를 아예 봉쇄하고 보는 일방주의는 동전 앞뒤 차이다. 입으로는 소통과 조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상대를 깔아뭉개고 싹마저 잘라 내겠다는 것은 설사문화의 전형인 것이다. 민심이 황곡만 중하게 여긴다면 민주주의 가치는 정치 야욕에 희생되고 분노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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