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5만원권이 유통되면

23일부터 시중에 유통될 예정인 5만원권은 1973년에 1만원권이 발행된 이래 처음으로 발행되는 고액권이다. 우리나라 경제는 그 이후로 36년 동안 급속도로 성장하여 물가는 13배 이상 올랐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50배 이상 증가하였음에도 1만원권 이상의 고액권이 발행되지 않아 자기앞수표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수표의 경우 발행과 지급 및 처리비용이 매년 2천800억원가량 소요되고, 일련번호 조회 등의 불편한 점이 있었다. 2006년 5천원과 1만원 신권이 새로 발행될 당시에 ATM기기 교체 비용으로 약 8천억원이 들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5만원권이 인식되도록 기기를 교체하려면 그만한 비용과 시간이 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수표 발행시보다 비용절감효과가 클 것으로 분석된다.

기술의 발달로 인터넷 상거래 및 전자화폐가 보편화되었고, 현금을 이용하지 않는 신용거래가 활성화되어서 현금이 없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여기에 5만원권의 도입으로 지갑은 더더욱 얇아질 것이다. 또한 돈과 관련된 우리의 전통적인 예절문화인 축의금이나 세뱃돈의 액수에 변화가 올 것이다. 돈의 액수보다는 받는 사람의 기분과 주는 사람의 성의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우리의 문화에서 지폐 한 장의 단위가 커지면 주고받는 금액도 변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축의금으로 만원권 지폐 3장을 봉투에 넣는 것보다 5만원권 1장을 넣는 것이 보기에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 명절에 세뱃돈을 줄 때도 전에는 1만원권 한장이면 최고로 아이들에게 인심을 썼다고 생각하던 사람도 5만원권이 생기면서 그렇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경제학 이론에서는 명목상 화폐단위가 바뀌는 것은 실물경제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아야 하지만, 이러한 관습 또는 심리적인 요인이 주는 효과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돈을 주고받는 우리의 문화가 변질되어 금품수수 등의 부정비리가 일어나기도 하는데, 예전에 고액권 발행을 반대하는 여론에서는 뇌물을 주고받을 때 편리해지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부패가 증가할 수도 있다는 웃지 못할 이유를 들기도 했었다.

고액권이 발행되면 물가상승을 유발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액권이 유통되면 화폐감각이 무뎌지게 되어 과소비가 조장될 것이라는 견해이다. 예를 들어 현재 시중에 4만5천원으로 가격이 책정된 물건이 있으면 5만원권이 유통되면서부터는 여러 이유를 들어 4만9천원으로 5만원에 근접하게 가격을 올려도 구매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900원, 9900원 식으로 가격을 책정한 물건이 많은 것과 똑같은 논리이다. 당국에서는 신용카드 거래가 활성화되어 있어 물가 상승의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앞에서 예를 들었던 축의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심리적인 요인이 작용하여 일상 경제에 많은 영향을 끼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품질개선이나 기술개발이 뒷받침되어 가격이 오른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경제에도 바람직하나, 돈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 가격이 오르는 현상은 인플레이션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떠안게 된다.

고액권 발행을 놓고 구상 초기에 초상화 인물 선정에서부터 경제적 편익 분석까지 논란이 많았으나, 결국 5만원권의 발행으로 차후 10만원권이 발행되기 전까지 논란은 일단락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기적인 화폐 유통 정책에 관한 논의는 궁극적으로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즉 화폐가치의 액면단위를 조정하는 것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야 한다. 몇몇 제3세계 국가를 보면 간단한 물품을 사는 데에도 돈다발 뭉치를 들고 가서 사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고액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력과 거래규모에 걸맞은 고액권발행으로 이러한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나지 않지만, 각국 통화 대비 우리나라 1원의 가치가 터무니없이 낮다는 것은 국가의 이미지 관리 측면에서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세계적으로 한 국가의 통화가 1달러 대비 천 단위가 넘는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경제 규모가 지속적으로 커져 수년 후에는 국부 총액을 표시하기 위해 조(兆) 단위가 아니라 그것의 1만배인 경(京) 단위를 써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게 된다. 과거 100원을 1환으로, 다시 10환을 1원으로 바꾸는 두번의 리디노미네이션을 경험했던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문턱에 서있는 현 시점에서 이 문제를 적극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조하현(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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