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강원도 방태산

원시림 속에서 한나절 짜릿한 은둔

내린천 발원지는 태고(太古). 물결은 시간을 거슬러 흐른다. 역류(逆流)의 물살을 따라 오르다 보면 원시(原始)와 만난다. 강의 상류에 접어들면 TV 수신 감도부터 현저히 떨어진다. 문명을 실어 나르던 포장도로는 이미 끝나고 태고적 흙길이 이방인을 맞는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 주던 전봇대도 멈춰 섰다. 문명을 뿜어내던 전파가 일순 멈추고, 광속으로 흐르던 시간도 정지했다. 여기는 시공을 넘어서는 경계. 적가리골 원시림으로 발을 내딛는다. 태고의 공간에 내가 받아들여지는 순간이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씨는 '지리산에 작은 몸 하나 누일 평지하나 없다'고 했다. 산악지대에서 평지는 생명과 안식의 터전이다. 방태산의 명소인 '3둔4가리'는 이태씨의 평지에 대한 갈망과 통해 있다. 둔(屯)은 산속의 '평평한 언덕'이란 뜻이고 가리는 '밭갈이(耕)' 즉, 밭과 통한다. 강원도 사람들의 평지에 대한 소망이 이런 명당의 조합을 만들어 냈다. 3둔은 달둔'살둔'월둔이고, 4가리는 아침가리'곁가리'적가리'연가리골을 말한다.

# 태고적 신비 담긴 '3둔4가리' 비경

방태산(芳台山'1,443m)은 강원도 인제군에 솟아 있다. 인간의 발길과 오랫동안 격리된 덕에 천혜의 숲이 잘 보존돼 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침엽수'활엽수들에서 세월의 무게가 묻어 난다. 다른 산에서는 필수코스인 사찰'암자 하나 없고, 산의 내력을 말해주는 정자 하나 없다. 그만큼 사람들의 접근이 드물었고 그래서 태고의 신비가 더 묻어 나는지 모른다. 이 원시림을 따라 형성된 생기(生氣)는 곳곳에 약수터를 만들었다. 특히 개인약수는 위장병과 피부질환에 효험이 있어 고종황제의 은사금까지 받았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마니아들만 몰래 숨겨 두고 찾던 코스였다. 최근에 휴양림이 들어서면서 옛 정취는 많이 사라졌지만 그 덕에 산을 대중의 품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등산로는 미산리~깃대봉이나 대개인동~배달은석, 적가리~구룡덕봉 코스가 있다.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방태산의 특징이 잘 집약된 코스로는 적가리골이 가장 무난하다.

#훼손되지 않은 원시림'계곡 자랑거리

적가리골 코스는 휴양림을 출발해 주억봉~구룡덕봉을 돌아 휴양림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다. 전체 길이는 11km 남짓. 6시간이면 충분하다.

주억봉 능선까지는 울창한 수림이 이어진다. '마지막 원시림'이라는 별칭답게 하늘을 뚫을 듯 뻗은 나무들이 지천이다. 이 거목의 낙엽을 자양 삼아 야생화들이 곳곳에 화원을 이루고 있다. 얼레지'노랑둥글레들이 산꾼들의 시선을 자꾸 빼앗아 간다. 나무와 꽃 사이 공간은 새들의 놀이터. 울창한 그늘을 배경 삼아 숲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한다. 이곳 새들은 무척 수다스럽다. 산행 길 내내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본격적인 활동시기를 맞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개체수가 웬만한 산의 두어 배는 되지 않을까 싶다. 넘쳐 나는 새만큼 계곡도 널려 있다.

울창한 숲과 그 사이를 흐르는 계류는 더없이 청량하다. 내린천 열목어의 수원(水源)이니 수질도 보증수표. 위생관념에 무딘(?) 등산객이라면 물병이 필요 없을 듯싶다.

#정상 오르면 강원도의 명산들 한눈에

새소리와 더불어 계곡의 물소리도 화음을 보탠다. 새소리가 악장을 리드해가는 바이올린이라면 물소리는 곡 전체 흐름을 넉넉히 받쳐 주는 첼로다. 귀를 활짝 열어 놓는다면 서너 시간은 '대자연의 합창'에 몰입할 수 있다. 산꾼들은 기본적으로 넉넉한 감성의 소유자들이지만 그래도 방태산에서만큼은 오감(五感)을 활짝 열어 두는 것이 좋다.

7부능선부터 시작되는 급경사는 웬만한 산꾼들도 질리게 할 정도로 악명이 높다. 1,400m 높이의 강원도의 명산이니 이 정도 수고쯤은 감수해야한다. 정상부터는 조망산행이 시작된다. 주억~구룡덕봉에 이르는 능선산행은 방태산 산행의 하이라이트. 멀리 설악산 서북능선부터 점봉산'가리왕산 등 강원 명산들의 스카이라인이 한없이 이어진다. 이 굴곡들을 보노라면 이곳 사람들의 '평지집착'은 숙명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방태산은 옛 비결서에 자주 언급되는 명당 터. 지구 밖에서 신문조각까지 들여다보는 우주시대에 '10승지'니 '피난처'니 하는 것들은 의미가 퇴색해 버렸다. 그러나 이 첨단의 시대에도 '은둔의 욕구'는 본능처럼 살아 있다. 하루쯤 내 존재를 세상에서 '열외'시키고 일상에서 잠적하고 싶다면 방태산에 오르라. 때마침 휴대폰도 먹통이 된다.

(취재 지원:산앙산악회 053)256-0786)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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