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근서의 대중문화 일기] 채널의 증가와 광고의 마술

텔레비전은 광고로 먹고 산다. 광고가 먹고 사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광고가 없는 텔레비전 방송이란 생각하기 힘들다.

광고가 있음에도 시청료를 걷는 이유는 무엇이고, EBS의 광고는 무슨 탓인가. 진작부터 콘텐츠에 요금을 부과했으면 좋았을 텐데, 방송의 주인이며 최종적 결제자인 시청자를 무시하고 광고주에 휘둘리는 이상한 방송 체제가 만들어진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이런저런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을 늘어놓자면, 아마 책 한 권도 부족할 것이다. 아무튼 광고는 텔레비전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고, 텔레비전의 삶과 죽음은 광고에 달려 있다.

광고에 목을 매다는 건 광고주들 또한 마찬가지다. 광고를 통하지 않고서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 소비자들을 상대로 하는 상당수의 상품들은 그 품질이나 기능이 구매의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지 않는다. 기술의 발달로 대부분의 상품들을 만들어내는 능력들이 평준화된 까닭이다.

브랜드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차이란 결정적인 기능의 차이나 품질의 차이가 아니라 그야말로 '개성'의 차이일 뿐이다. 상품의 차이란 이제 '문화적'인 것이다. 광고주들은 필사적으로 자사의 상품이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그 가장 보편적 방법이 광고인 것이다.

텔레비전 광고는 가장 많은 수의 소비자들에게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광고 매체였다. 물론 지금도 변함없이 그렇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어떤 텔레비전이냐가 문제다.

적어도 유선방송이 자리를 잡기 전까지만 해도 텔레비전 광고는 소위 지상파 3사가 과점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우리 텔레비전은 무서운 속도로 변화했다. 케이블이 자리를 잡았고 위성방송이 나름의 시장을 확보하고 있는 데다, DMB와 IPTV가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다.

물론 많은 채널들이 겹칠 뿐 아니라, 프로그램의 중복은 지겹지만, 아무튼 텔레비전을 통해 광고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 광고가 가능한 시간이 늘어날수록 힘을 갖게 되는 쪽은 물론 '광고주'다.

결국 공급이 증가하면 수요자가 힘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채널이 늘어날수록 광고주, 특히 대형 광고주의 힘은 더욱 커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작 힘을 가져야 할 쪽은 사실 광고주가 아니라, 소비자 즉 텔레비전의 시청자여야 한다. 광고를 위해 미디어에 지불되는 돈은 결국 소비자의 주머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자기 주머니를 털어 광고에 쏟아 붓는 기업이 어디 있겠는가. 광고비는 상품의 가격에 아주 잘 반영되고 있다. 광고주의 힘은 소비자 즉 시청자의 주머니에 있다는 아이러니가 광고의 마술이다.

미디어가 늘고 있고 채널이 늘고 있다. 정부는 신문의 방송 겸영, 대자본의 방송 사업 참여를 허용하려 하고 있다. 명분은 일자리 창출과 채널 혹은 방송 콘텐츠의 다양성이다. 새로운 방송사가 생긴다고 얼마나 일자리가 창출되고 채널의 다양성이 확보될지 의문이다.

더불어 이러한 상황이 과연 얼마나 시청자 혹은 소비자의 힘과 권익을 위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쟁점이 되고 있는 두 개 혹은 세 개의 종합편성채널과 뉴스채널 신설이 혹 소비자와 시청자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 빌붙어 완장차고 칼 휘두르는 광고주들의 힘만 키워 놓게 되는 것은 아닌가?

더구나 지역의 소비자와 시청자를 외면하고 중앙 중심의 문화적 구도를 더욱 가속화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소비자의 주머니를 털어 시장을 지배하는 기업이 미디어까지 갖게 된다면, 그야말로 재주 부리는 쪽과 잇속을 챙기는 쪽의 괴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괴리야말로 부조리와 소외의 원천이다. 불을 보듯 뻔한 일이더라도 굳이 쫓아가 반대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으로 알고 넘어가는 게 문화 속 정치다. 소비자와 시청자들이 말하지 않으면 또 누가 말하겠는가?

(대구가톨릭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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