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긴장을 하면 '피를 말린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의학적으로도 피를 말리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사람이 긴장하면 체온이 올라가고, 이 열이 피를 졸아들게 해 간을 손상시킨다는 것이다. 체온계 하나 없던 시절에 '피를 말린다'는 표현을 쓴 옛 사람들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피를 말리는 추리소설의 계절이다. 여름방학이 되면 300원 하던 동서추리문고에 빠져 무더위를 잊었던 학창 시절이 기억난다. 크로프츠의 '통'을 비롯해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 등 걸작들은 이때 대부분 읽었다. 추리소설 중에서 특히 좋아했던 것이 스파이소설들이다. 한때 '자칼의 날' '오데사 파일'을 쓴 프레드릭 포사이스에 빠져 그의 작품을 찾아 헤맨 적도 있었다.
이때 무명의 작가가 하나 등장했다. 켄 폴레트. 낯선 이름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을 읽는 순간, 땀 구멍이 모두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로 '바늘구멍'(Eye of the Needle)'이란 작품이다. 1981년 도널드 서덜랜드 주연의 영화로 나와 인기를 끌기도 했다.
켄 폴레트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바늘구멍'을 출간해 미국 추리작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에드가 알랜 포우상'을 수상했다. 이후 중동전을 배경으로 한 '트리플'을 비롯해 '사나운 새벽' 등을 발표했지만, '바늘구멍'의 피를 말리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바늘구멍'은 고전적이며 전통적인 첩보물이다. 현대 추리물에 나오는 논리의 비약이나 개연성 부족 등을 용납하지 않는, 바늘 끝 같은 긴장감을 준다. 등장 인물도 많지 않고, 더구나 잔인하고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독일 스파이에 대항하는 것이 외딴섬에 살고 있는 힘없는 주부라는 설정이 흥미롭다.
암호명 디 나델(Die Nadel). '바늘'이란 이름으로 암약하는 독일 최고 스파이, 헨리 페이퍼(도널드 서덜랜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감정도 개입시키지 않는 치밀하고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다. 소리 없이 바늘로 살인을 저지르며 영국 정보부의 추적망을 매번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그는 2차대전 최고의 정보를 알아낸다. 연합군이 노르망디로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정보다. 연합군은 칼레로 상륙하려는 위장 전술을 펼치고 있던 때다. 이 정보가 히틀러에게 전해지면 2차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끝날 공산이 크다.
독일로 귀환하려는 도중 태풍으로 배가 부서지는 바람에 외딴섬에 흘러 들어간다. 이 작은 섬에는 등대지기 부부와 아들이 전부. 그나마 남편은 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알코올에 의지해 살아가는 괴팍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성기능 불구의 남편을 둔 아름답고 매력적인 영국 여성 루시 로즈(케이트 넬리건). '폭풍의 섬'에 갇혀 살지만, 그 속에는 본능과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말쑥한 남자가 폭풍 속에 떠밀려 온다. 그가 조국을 치명적인 위험에 빠뜨릴 독일 스파이인 줄 모른 채, 이 남자에게 빠져든다.
2차대전의 승패를 가를 일급 정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숨막히는 도주와 추적이 치밀한 구성과 빠른 전개로 펼쳐진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인물 설정이다. 불구인 남편과 매력적인 아내, 철없는 아이, 냉혹한 남자가 고립된 섬을 배경으로 위험한 관계를 이어간다는 단순하면서도 완벽한 서스펜스의 설정이다.
탄탄한 근육질의 남자가 의식불명인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다. 로즈는 낯선 이 남자에 대해 본능적으로 끌린다. 목욕을 하는 순간 이 남자가 깨어나 문을 연다. 멍한 상태에서 눈을 맞추고 다시 쓰러진다. 내가 벗고 있는데, 내 몸을 보지도 않았어. 중요한 부분도 말이야. 로즈는 이미 첫 순간부터 몸이 반응한다. 그리고 섬처럼 고립되고, 갇혀 있던 본능이 깨어난다.
'바늘'도 마찬가지다. 팽팽한 긴장 속에 살아왔던 스파이의 냉혹함이 이 여인으로 인해 균열이 생긴다. 한 치의 허점도 없던, 그의 마음 속에 한 여인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 또한 막을 방법이 없다. 고립된 공간에서 숨막히는 삼각관계가 이어진다.
서둘러 욕망을 채우던 로즈는 차츰 냉정을 찾고, 그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영국을 구할 수 있는 사람도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평소 같으면 로즈를 죽여야 하지만 '바늘'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리고 U보트로 향하기 위해 배를 저어간다. 그때 로즈가 해변에서 그에게 총을 겨눈다. 차갑기 이를 데 없던 이 남자는 촉촉한 푸른 눈으로 로즈를 쳐다본다. 그리고 이어지는 총소리.
비록 독일군 스파이지만 외롭게 죽어가는 '바늘'의 최후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죽음보다 더한 순정이다. 남편도 잃고, 사랑하는 남자마저 잃은 로즈도 마찬가지다. 냉혹한 현실 속에 일순간 싹튼 감정은 그렇게 끝난다.
감독 리처드 마퀀드는 '바늘구멍'에서 보여준 스릴 넘치는 연출로 조지 루카스에게 인정 받아 '스타워즈 3'를 감독하기도 했다. 인기 미국 드라마 '24'의 주연 키퍼 서덜랜드의 아버지인 도널드 서덜랜드는 총구처럼 차가운 이미지의 뛰어난 연기로 전 세계 팬들에게 각인되었다.
스파이소설로서는 흔치 않은 이같은 설정은 추리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여성 독자들에게도 매력적이다. 여름에 읽으면 기가 막히게 좋을 이 추리소설이 몇 년째 절판 상태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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