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영어바람 속의 모국어

동화작가가 독자인 어린이를 만나면 가슴 설렌다. 반가워서 그렇기도 하지만 어린이다운 발랄함이 선사할 신선한 대화를 기대해서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때로는 뜬금없는 질문 때문에 당황할 때도 있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어떤 어린이가 물었다.

"선생님은 영어동화를 안 쓰세요?"

나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린이는 그럼 앞으로 쓸 계획도 없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말하자 그는, 만약 영어동화를 쓰면 돈도 많이 벌 테고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충고해 줬다. 나는 이렇게 받는 것으로 그 짧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고마워. 하지만 나는 우리말을 사랑한단다."

좀 당황스러운 대화였지만, 그 어린이가 왜 그런 뜬금없는 질문을 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요새 부는 영어바람은 거의 태풍에 견줄 만하다. 아무도 거스를 수 없고 누구도 휩쓸리지 않을 수 없다. 눈만 뜨면 영어 사교육, 영어회화, 영어교재, 영어시험, 영어마을, 영어캠프…, 이 거센 바람에 실려 살아가는 어린이에게 영어는 이미 삶의 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질문을 '뜬금없다'고 여긴 내 감수성이 무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영어는 이미 우리 나라에서 외국어의 자리를 넘어섰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영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걸 보면 도대체 영어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하나 싶기도 하지만, 영어든 뭐든 배워서 나쁠 건 없으니 그 배우는 일을 두고 딴죽을 걸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우리말이 아예 '이등 언어'로 밀려나 버리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미 세상의 '영어 편애'는 도를 넘어섰다. 굳이 지난해 우리 나라 지방자치단체들의 영어 관련 예산이 모국어의 그것보다 스무 배나 많더라는 신문 보도를 끌어댈 것도 없다. 요새 세상에 어느 집에서 자녀의 '국어 교육'을 위해 돈을 쓰고 품을 들일 것인가.

물론 영어바람이 반드시 모국어 사랑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영어를 잘 하면서 우리말을 사랑하는 이들도 많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을 지나치게 떠받들다 보면 다른 쪽은 저절로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이 세상 이치다. 이미 우리는 안다. 요새 영어 공부는 '생존'의 문제이지만 우리말 사랑은 다만 '취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는 영어바람이 결코 우리 선택이 아님을 말해 준다. 우리는 '좋아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 바람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좀 부풀려 말한다면 '독립운동'이라도 하듯 비장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모국어 사랑에 나서기도 힘들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끈을 놓아버리면, 그 순간 우리는 남의 종이 될 수도 있다.

내게 영어동화를 쓰기를 권한 어린이는 그 근거로 돈을 많이 버는 것과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 것을 들었다. 영어가 돈벌이가 됨을 이미 깨달았으니 매우 영리한 어린이라 하겠다. 하지만 '세계적'인 작가가 될 거라는 그의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영어가 이 세상 모든 언어를 대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과연 비영어권 나라 작가가 영어로 글을 쓰면 세계의 주목을 받을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세계적인 작가이지만 그가 쓴 것은 러시아어로 쓴 글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조국 러시아를 사랑했고 또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사랑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세계적인 작가가 된 것이다. 우리 나라 작가가 세계로 나서는 길은 영어로 글을 쓰는 일이 아니라 우리말을 사랑하여 그로써 치열하게 글을 쓰는 일이다. '가장 한국다운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은 공연한 말치레가 아니다.

'황토마루 수무나무에 얼럭궁 덜럭궁 색동헝겊 뜯개조박 뵈짜배기 걸리고 오쟁이 끼애리 달리고 소삼은 엄신 같은 딥세기도 열린 국수당고개를 몇 번이고 튀튀 춤을 뱉고 넘어가면 골 안에 아늑히 묵은 영동이 무겁기도 할 집이 한 채 안기었는데….'

천재시인 백석의 시 한 구절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감칠맛 나는 말이 또 있으랴. 우리 아이들이 일찍부터 이 좋은 우리말을 알고 자라느냐 모르고 자라느냐는 우리 어른들 손에 달렸다.

서정오(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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