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충진의 여기는 독도] (73) 역사⑮-의용수비대③

절벽 난공사 뚫고 동도 막사 건립

경북대학교 울릉도·독도연구소장 박재홍(가운데) 교수와 연구원들이 7월 들어 주기적으로 독도를 찾아와 외래식물과 식생 등에 대해 모니터링하고 있다.
경북대학교 울릉도·독도연구소장 박재홍(가운데) 교수와 연구원들이 7월 들어 주기적으로 독도를 찾아와 외래식물과 식생 등에 대해 모니터링하고 있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왜놈 해군제독이지만 대단해"

독도의용수비대는 동도 정상 부근에 영구막사를 짓기 위해 정지작업을 했다. 바위를 깨고 땅을 뒤집자 목탄더미가 튀어나왔다. 러일전쟁 때 일본이 러시아 발틱함대를 잡기 위해 망루를 설치했던 흔적이다. 도고는 천하무적 러시아함대를 수장시키기 위해 물 한 방울 없는 절해고도에도 초병(哨兵)을 세웠던 것이다.

"헬기장 아래 현재 경비대 막사 자리가 그때도 평평했는데, 양 옆으로 팔뚝만한 해송도 두 그루가 있었어. 일본인들이 노일(露日)전쟁 때 망루를 설치했던 곳이야. 그곳에다 막사 터를 잡기로 했지. 박격포는 동쪽 바다가 훤히 보이는 지금의 등대자리에 설치하고 그곳에서 보초를 섰어."(의용수비대 보급선 '삼사호' 선주 겸 기관장 이필영씨 증언)

"탄환 한 발 남김없이 건져." 서도에서 동도로 거처를 옮기는 중간에 전마선이 뒤집혔다. M1소총 10정과 배에 가득 실은 탄환이 수심 15m 바다 속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목숨과도 같은 무기와 탄환을 수장시킬 수는 없는 노릇. 다행히 잠수의 명수 이상국·이규현 두 대원이 있어, 종일 필사적인 자맥질로 고스란히 건져 올릴 수 있었다.

홍순칠 대장은 동도에 임시 거처가 마련되고 진지 구축이 끝나자 수비대 영구 막사를 짓기 위해 울릉도로 나갔다. 나선 길에 울릉경찰서 구국찬 서장을 찾아가 수비대를 동도로 옮겼다고 설명하고, 막사 짓는 일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구 서장은 적극적인 협조와 병력지원까지 약속했다. 그리고 임상욱 군수에게도 도움을 부탁하고, 가짜 징집영장 300장을 만들어 울릉군민들을 강제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홍순칠이는 나보다는 초등학교 두 학년 밑인데 상이군인사무소를 이끌어 나가는 데 수완이 좋았지. 보통 사람들하고 달리 배짱도 두둑했어. 주먹도 좀 쓰고 해서인지 몰라도 이리저리 돈도 잘 끌어댔고. 수비대 막사 지을 나무는 홍 대장 집안 산이 '굴바우'에 있어서 거기서 베어왔지."(이필영 씨 증언)

수비대 막사 건립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우선 동도 정상으로 오르는 길 만들기가 급선무였다. 폭약이 없다 보니 일일이 정과 망치로 길을 뚫었다. 가짜 징집영장으로 독도에 동원된 군민만도 150여명. 집안 산에서 베어온 나무를 나르고 울릉도 목수 최성용씨가 건축을 맡았다.

깎아지른 바위틈 길을 뚫는 작업은 난공사였다. 작은 섬에 많은 인원이 들끓으니 물부터 턱없이 모자라 고통을 겪었다. 공사 중에 주민 한 명이 다쳐 울릉도로 돌아갔으나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기도 했다. 울릉도경찰서에서는 길대흥 경위와 경찰관 3명, 무선전신국 기술자 3명, 기술공 등을 독도 현장에 보내 독려하기도 했다.

힘겨운 공사에 동원된 주민들은 매일처럼 고사(告祀)를 지내고 술을 들이켰다. 공사기간 동안 15되들이 소주독을 30독이나 비워냈다. 동·서도 구름다리를 놓을 계획을 세웠으나 워낙 난공사에 지쳤고 연약한 지반에 교각을 세울 수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김병렬 저 '독도를 지키는 사람들')

그 즈음 육지에서는 6·25전쟁이 끝났다. 휴전 며칠 후, 1953년 7월 30일 난데없이 해양경비대 경비정 '칠성호'(七星號)가 독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배에서 울릉경찰지서 박춘환 경사와 순경 4명이 내리고 그들이 타고온 칠성호는 곧장 울릉도 쪽으로 사라져갔다. 그들은 작전명령에 따라, 각자 칼빈 소총 1자루와 약간의 식량과 된장·간장 그리고 소주 몇 상자를 가지고 독도경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도착한 것이다.

"박형 오랜만이오. 어쩐 일이오" 하고 박 경사에게 물으니 "본서(本署)에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고 들어가니 독도에 가서 경비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이렇게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껏 소총 몇 자루에 경찰관 5명으로 독도를 지키라니….

의용수비대원들도 반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생고생을 하면서 지은 막사의 잠자리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모포 한 장도 없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이들이 반가울 리가 있었겠는가. 대원들은 회의 끝에 경찰과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모두 서도로 다시 건너가기로 결정했다.(홍순칠 수기)

제국주의 팽창기 일본 제독 도고는 동해의 중심축 독도를 주목했다. 독도를 손에 넣으면 한국과 러시아, 일본의 바다를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도고 제독이 부하를 사지(死地)로 내몰며 독도에 망루를 설치한 이유를 우리는 50년이 지난 이후에야 비로소 알았다.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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