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격돌은 언제부터인가. 해적들은 정말 검은 바탕에 흰 해골 그림 깃발을 휘날리며 습격했을까. 국경을 초월하는 이슬람교의 동질감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성전(지하드)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십자군 전쟁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서기 570년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나고, 613년 포교를 시작한 이래 코란과 칼을 든 이슬람의 물결은 들불처럼 서쪽으로 번졌다. 642년 알렉산드리아 함락으로 이집트가 이슬람화됐고, 카르타고가 함락된 698년 북아프리카 전역이 이슬람화됐다.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뒤 이슬람은 성전이란 이름 아래 지중해 건너편 기독교 사회(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의 여러 섬, 북부 기독교 제국)를 무차별 습격했다.
이탈리아 반도 해안가의 수많은 '사라센탑', 낭떠러지 위에 건설된 집들, 견고한 방어벽, 구불구불한 도시의 골목, 군사시설을 방불케 하는 수도원들…. 이 모든 것들이 오늘날엔 훌륭한 관광상품이지만 7세기 이슬람의 해적질이 시작된 이래 1천년 동안 살아남기 위한 사투의 흔적이다.
서기 652년 코란과 칼을 든 이슬람 해적은 처음으로 기독교 세계를 습격했다. 시칠리아 섬에서 가장 큰 도시인 시라쿠사를 습격, 약탈하고 800명의 남녀를 납치해 알렉산드리아의 노예 시장에 팔았다. 이후 1천년이 넘도록 지중해를 휩쓸고 다닌 사라센 해적(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에 대한 기독교 사회의 명칭)의 노략질이 시작된 것이다.
이슬람교도에게 국가나 민족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기독교도는 '잘못된 신앙을 믿는 개들'이었다. 그래서 전투 때는 포로나 부상자가 없었다. 모두 죽였다. 인간이 아닌 '개'가 사람한테 칼을 들고 덤볐으니 용서할 수 없었다.
북아프리카 이슬람교도들이 지중해 건너 기독교 사회를 대상으로 펼치는 해적 행위는 '성전'이었다. 팍스로마나(로마제국에 의한 평화)가 무너진 기독교 세계는 약탈하기 쉬운 곳이고, 이교도들은 죽여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해적질은 이슬람 포교를 위한 성전에 돈벌이까지 되는 수지맞는 사업이었다. 이슬람 동포를 먹여 살리는 중요한 산업이기도 했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들이 주로 노린 곳은 지중해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도시들이었다. 그들은 적은 병력으로 방비가 허술한 곳을 습격해 약탈하고 달아났다.
세월이 지나면서 해적들은 사람을 구분해서 납치했다. 돈이 없는 사람을 노예로 팔아먹었고 돈이 많은 사람은 막대한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다. 도시를 공략하는 방법도 진화했다. 방비가 훌륭한 도시를 공격하느라 힘을 낭비하는 대신 주변을 철저하게 노략질함으로써 도시가 '비명'을 지르게 했다. 봉쇄된 도시들은 돈을 지불하고 해적의 철수를 부탁했다. 작은 도시만 그랬던 게 아니라 시칠리아 섬 최대 도시 시라쿠사도 해적의 철수를 조건으로 돈을 지불했다. 나중엔 교황도 돈을 지불했다.
해적들이 끊임없이 노략질을 감행했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소탕전을 펼치지 않았다. 펼칠 힘도 없었다. 8세기, 지중해 세계는 동쪽도 남쪽도 서쪽도 모두 이슬람 세력이 차지했다. 기독교 세계는 북쪽에 조금 남아있을 뿐이었다.
9세기에 이르러 이슬람 해적들은 로마에서 가까운 항구도시 치비타베키아를 공격해 초토화했다. 830년에는 로마까지 공격했다. 비잔티움제국이 기독교 사회를 지키지 못하자 교황은 프랑크 왕국으로 눈을 돌렸다. 동방의 로마제국 비잔티움을 두고 서방에 다시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한 것은 그 때문이다. 교황 레오 3세와 프랑크왕국의 왕 샤를은 그렇게 손을 잡았고, 샤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됐다.(프랑크족은 지금의 프랑스 사람들이다.)
샤를은 함대를 만들어 지중해를 순찰했고, 해적을 섬멸했다. 그러나 노인이었던 샤를은 곧 세상을 떠났고 2년 뒤 교황 레오 3세도 세상을 떠났다. 샤를의 아들과 손자들은 서로 다투기 바빴고 지중해는 다시 무주공산이 됐다. 10년 동안 숨죽이고 있던 이슬람 해적들은 다시 바다로 나왔다.
해적 활동은 이슬람 세계 전체 입장에서 볼 때 '테러 전법'이었다. 해적질로 불안을 부채질하고,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이슬람은 군대를 보내 정복했다. 이슬람 세력이 그처럼 빠르고 넓게 확장된 것은 그 덕분이었다. 8, 9, 10세기에 지중해 일대 기독교도들에게 안전한 곳은 없었다.
해적들은 납치한 건장한 남자를 갤리선의 노잡이로 썼다. 어떤 사람은 농장에 노예로 팔아먹었다. 또 어떤 남자는 개종시킨 후 병사로 써먹었다. 이교도는 성전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병사로 쓰기 위해서는 개종이 필요했다. 젊은 여자들도 개종을 강요당했다. 이슬람은 이교도 여성과 성관계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갤리선 노잡이 중 용맹함이 눈에 띄는 자를 뽑아 해적으로 만들었다. 해적 역시 이교도여서는 안 된다. 기독교도인 청년을 이슬람교도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책략을 썼다. 기독교도인 젊은이가 이슬람인을 죽이게 하는 것이다. 이슬람인을 죽인 이교도는 무조건 사형이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가 이슬람교도를 어쩔 수 없이 죽인 상황이라면 용서가 가능하다. 책략에 말려 사람을 죽인 기독교 젊은이는 살기 위해 개종하고 해적이 됐다. 개종해 해적선의 선장이 된 사람도 있었다.
해적의 잦은 습격에 기독교인들은 깎아지른 벼랑 위나 산으로 도망쳤다. 오늘날 남부 이탈리아의 집들이 벼랑 위에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바닷가를 떠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망루를 세워 해적의 습격을 살폈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자위 수단은 망루(사라센 탑)를 높이 세워 해적선의 습격을 조금이라도 빨리 파악, 도망칠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다. 해적들은 영화처럼 해골깃발을 달지 않았다. 무역선처럼 위장해 다가왔기 때문에 해적임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해적들은 공성전투에 능하지 않았다. 빠르게 습격하고 곧 떠났다. 당연히 그들은 쉽게 약탈할 수 있는 곳을 공격했다. 성 밖에 있는데다 재물이 많았던 수도원은 좋은 목표였다. 습격과 약탈이 심해지자 수도원은 점점 군사적 시설처럼 외벽을 갖추게 됐다. 도시 구조는 적을 막기 위해 쾌적성을 멀리하고 방어를 목표로 삼게 됐다. 골목을 구불구불하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로마제국의 화려한 영광이 끝난 뒤 중세는 기독교인들에게 말 그대로 암흑기였다. 이 책은 로마 이후 거의 1천년에 걸친 기독교와 이슬람의 격돌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상권 404쪽'1만5천500원, 하권 480쪽'1만6천5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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