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를 딱하게 여겨 어리석은 백성에게 문자를 마련해주려는 생각에서 정음(正音)을 창제하게 되었다."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단을 갖지 못한 백성에 대한 군주의 깊은 배려를 엿볼 수 있는 세종의 훈민정음 서문입니다.
백성에 대한 군주의 사랑이 물씬 풍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단순히 애민(愛民)의 정감 수준에서만 귀감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문자가 개인에게는 단순히 의사 표현의 수단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둘 이상의 사람이 모인 사회 집단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소통의 수단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따라서 세종의 한글 창제는 바로 소통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집권 후 세종은 군주로서 피치자와의 직접적인 소통을 절감했을 것이며, 그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한글 창제를 가능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군주로서의 세종은 정확한 현실 인식을 갖춘 동시에 '한글 창제'라는 실제적인 대응 능력까지 보여준 실천적 리더였습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이미 용비어천가의 제작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며, 정음을 이용하여 사서오경과 운서, 대명률을 번역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율문(律文)이 중국 글로 되어 있어서 담당 형리들조차 해석하여 적용하는데 어려움을 겪던 실정을 감안하면 세종의 실천적 의도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율문을 알면 자기 지은 죄의 경중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형리는 한 차례의 태(笞)나 한 차례의 장(杖)이라도 반드시 율을 따라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세종은 또 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언로(言路)를 담당하는 수령의 선발과 단속에도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해진다. 내가 박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생민의 주가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어루만지는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다. 이에 백성과 친밀한 수령을 신중히 선택하고 출척(黜陟)하는 법을 거듭 단속했는데도, 오히려 듣고 보는 바가 미치지 못함이 있을까 염려된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세종은 취임 첫 해에 9개 조목의 시정책을 제시합니다. 그 가운데 '지난 30년에 걸친 수령들의 고적(考績)사항을 제출할 것을 요구'하는 항목이 눈에 뜨입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듯이 위민정치의 성공 여부는 수령에 대한 통솔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종 즉위년 1월 17일의 기록입니다. '강원도 행대(行臺) 김종서가 복명하기를 "경차관(敬差官) 김습이 흉작을 풍작으로 꾸며 과중하게 간평했습니다"라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야말로 토색질하는 놈이니 사헌부로 하여금 엄중히 처벌하게 해야 한다"고 분노했다'고 합니다.
'동방의 성주(聖主)' '세종성왕(聖王)'으로 추앙받는 정치인 세종대왕의 이야기는 정윤재 교수의 '세종의 국가경영'(지식산업사, 2006)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글을 창제했고,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을 발명한 영명한 임금이었고, 4군 6진을 설치하여 여진족을 막아냈고,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를 섬멸한 임금이라는 단편적인 업적 위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교적 국가 경영에 성공한 정치인 세종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소통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소통의 수단을 만들고, 그것을 활용하여 다양한 소통 방법들을 고안하고 실천한 세종의 정치(政治)는 그야말로 정치(正治)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세종의 이야기는 5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입니다. 가치 아노미상태에 빠진 우리 사회, 역사를 역주행시키고 있는 현재의 우리는, '효행록'과 '삼강행실도'를 만든 세종의 마음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예를 갖추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노동일 경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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