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할 부위의 머리카락을 깎고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웠다. 기분마저 서늘해졌다. 삶이 10년 만에 그에게 주는 쉼표였다.
'세상 것이 다 부질없구나. 인생, 별볼일 없구나.'
속으로 되뇌었다. 3월, 뇌혈류 검사 도중 이상이 발견돼 시작한 수술은 이렇게 끝이 났고 세종한정식 손정우(66) 사장은 그렇게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났다. 원래 씩씩하고 긍정적인 그녀였지만 요즘 더욱 사는 게 즐겁다.
"아침에 눈뜨면 감사해요. 와, 멋지다, 새날이구나! 이렇게 아침마다 감사하며 살아가죠. 집을 나서기 전 현관 앞에서 웃는 연습부터 합니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라면 손 사장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손 사장은 오래 전부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등 예술을 누구보다 사랑해왔다. 사랑하는 만큼 쓴소리도 마다 않는다. 누군가는 '회초리'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누구 눈치볼 것 없이 대구 예술계에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화가들은 그림값을 자기가 매기지 말고 시인들은 자기 시 말고도 남의 시도 읽어야 해요."
거침없는 입담의 그녀지만 소녀 같은 감수성이 속깊이 숨겨져 있다. 그녀의 감수성은 유년시절에 닿아있다. 고향인 경주에서 7남매가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던, 그 시절이 그에겐 참 고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여성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며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풀어냈다.
"일곱살 때인가, 선반 위 엄마의 바느질함을 몰래 꺼내보는 게 저의 가장 큰 기쁨이었어요. 열어보면 모시'비단조각'골무…. 예쁜 여인네가 들어있는 것 같아 너무 좋았어요. 엄마의 경대를 열면 그 박가분 냄새는 어찌나 향기롭던지요."
어머니는 다섯 딸들을 위해 장독대 주위에 철마다 꽃을 심었다. 봄이면 그곳에 작약'목단, 여름이면 봉숭아'맨드라미가 피었다. 고무신 장사에게 어머니는 해마다 "꽃 달력이 있으면 우리 딸 방에 걸어주게 좀 구해주세요"라고 1년 전부터 부탁을 하셨다. 그 고운 꽃 달력 밑에 그는 시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어머니는 그에게 베풂의 삶도 가르쳐주셨다. 요즘처럼 비오는 여름날이면 한 솥 가득 감자를 쪄낸다. 감자가 식기 전에 동네 곳곳에 배달하는 건 그의 몫이었다. 정작 본인은 심부름 다 끝낸 후 감자를 먹을 수 있었다.
그 시절의 씨앗은 지금 결실을 맺고 있다. 그는 장학재단인 세종산업문화재단을 설립, 대학생들과 조손가정에 매년 장학금을 주고 대구를 찾는 6'25 참전 미국 군인들에게 숙식을 후원해준다.
그는 식당을 하며 지역 작가들 작품 200여점을 구입했다. 작품가격 차익을 노린 것이 아니다. 넉넉지 못한 화가들의 사정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파 그림을 사곤 했다. 그의 식당에는 20여점의 미술작품이 늘 걸려 있어 웬만한 갤러리 못지않다. 시인들에게도 대가 없이 찬조하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문화예술인들에겐 든든한 후원자인 셈이다. "내가 남을 돕는 것 같지만 돌아보면 남의 덕에 사는 겁니다. 그림과 시를 좋아하니 평생이 풍요로운 걸요."
1999년 세종한정식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만 10년째를 맞는다. 그는 "선생하며 보낸 25년보다 길가 집 10년 세월이 훨씬 풍부하고 재밌었다"고 회상한다. "식당 안 했으면 사람 사는 법과 도리, 재미, 슬픔을 알 수 있었을까요?" 10년에 한번쯤 크게 앓는다는 그는 이번 수술을 통해 다시 한번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내 직업은 농부'라고 말하는 그가 가장 행복해 하는 시간은 경산 농장에서 농사를 지을 때다. 7년 전부터 해온 농사일은 그가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다독이는 '정신병원' 같은 역할을 해준다. 건강과 믿을 만한 먹을거리는 덤이다.
식당은 밥을 먹여 배만 불리는 곳이 아니다. 식당 주인이 밥 먹는 이의 외로움과 괴로움도 헤아려 준다면 사람들은 마음을 치유받을 수 있는 곳이다. 손 사장의 식당이 늘 붐비는 이유다.
"내가 사는 데 그리 많은 사람이 필요치 않더라고요. 더 조촐해졌어요. 있는 듯 없는 듯, 돌담이 있는 집에 호박넝쿨을 가꾸며 그렇게 살고 싶네요."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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