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포한 바다는 섬을 굴복시키고 악행하는 마귀처럼 기어코 제물을 요구했다. 끝내 그 제단에 바쳐질 희생은 독도를 지키러 나선 젊은 피의 부담이었다. 갑작스런 태풍 소식에 일행은 황망했다. "위문보다 여러분의 안전이 중요하니 지금 즉시 철수하시기 바랍니다."
홍순칠 대장이 김종원 경찰국장에게 권했다. "그럼 홍 대장, 우리는 돌아갈 것이오. 박격포 포탄 100발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것이니 요긴하게 쓰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배가 정박한 곳으로 내려갔다. 모두 타고 온 칠성호에 오르려는 순간 일행 중에서 카메라를 막사에 두고 왔다고 했다.
나이가 어리고 재바른 허학도 통신사가 카메라를 찾아들고 막사를 나섰다. 급한 마음에 그는 전투화 끈도 매지 않은 채 서둘렀다. 막사 끝 절벽이 시작되는 지점, 불운하게도 그는 자신의 전투화 끈을 밟아 넘어지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허 통신사는 배를 타려는 위문단 앞에 너울거리는 옷가지처럼 떨어지며 두개골이 깨어져 뇌수를 쏟아냈다. 즉사한 것이다. 일행은 경악했다. 거센 비바람은 몰아치기 시작했고, 박격포탄 100발은 해안에 방치되었다. 주검을 수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총을 잡은 의용수비대원들 눈에는 원망의 핏발이 섰다. '위문단이니 뭐니 해서 애먼 사람만 잡았다'는 것.
일촉즉발의 상황, 홍 대장은 이 상태로 태풍이 몰아치면 박격포탄이 터져 전원 몰살당한다고 대원들을 진정시켰다. 우선 위문단 일행을 칠성호에 태워 출항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쌀 한 가마니를 쏟아 붓고 허학도 통신사 시신을 수습하여 오징어배 뱃머리에 단단히 묶었다.
홍 대장은 울릉도에서 근무 나온 경찰 5명을 집결시켜 조총 3발씩을 쏘게 한 다음, 소주 몇 병을 건네주고, 울릉도까지 시신을 운구하도록 했다. 졸지에 동료를 비명에 떠나보낸 의용수비대원들은 허망했다. 그들은 허학도 통신사의 혼령 출현 소동을 겪으면서 슬픔 속에 장례식을 치렀다.
기러기 울음소리가 잦고 갈대잎이 서걱거리면서 가을은 깊어만 갔다. 대원들은 개볼락을 잡아 간하고 소라 전복을 따서 말리는 등 월동준비로 분주했다. 그러던 11월 21일 이른 아침, 눈을 뜨고 막사를 나선 홍순칠 대장 1Km 전방 시야에 1천톤급 함정 3척이 독도를 포위하는 형태로 접근했다.
대원들은 기민하게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일본 함정이 500m 앞까지 접근했을 때 홍순칠 대장은 권총 한 발을 쏘면서 '사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 독도가 무너질 듯한 의용수비대의 총격이 시작되고 박격포 제1탄이 전진하는 일본 함정의 선수(船首)를 때렸다.
배 위의 몇몇 사람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3척의 함정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서로 예인하여 검은 연기를 내며 동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엄호하며 날아온 비행기는 한참 동안이나 공중을 선회 위협하다가 종내에는 기수를 돌려 일본 쪽으로 날아갔다.(홍순칠 대장 수기)
일본 NHK방송 뉴스는 '다케시마'에서 한국경비대가 발포해 해상보안청 함정들이 피해를 입고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또 일본은 이날 사건을 계기로 한국 정부에 항의각서를 제출하고 독도우표를 붙인 편지를 모두 한국으로 반송하기에 이르렀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용케도 함정과 비행기를 격퇴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 있을 해상과 공중 양면공격에 또다시 개인화기와 박격포 대응으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홍 대장은 위장술을 쓰기로 했다.
선산(先山) '굴바우'에서 큰 소나무를 베어와 나무대포를 만들기로 한 것. 포병 출신 대원이 주축이 되어 포신이 빙빙 도는 200mm 대포를 깎아 멋지게 에나멜까지 칠해 모양을 내고 위장했다. 당시 일본 '킹구' 월간지에는 '독도에 거포 설치'란 제목의 기사가 실리고, 그 이후 일본의 함정이나 비행기는 독도 근해로 접근하지 않았다.
맨주먹으로 독도를 지키겠다고 나선 의용수비대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1956년 12월 무기 일체를 국립경찰에 인계하고 '공식적인' 활동을 종료했다. 물론 활동의 공식 종료 이전에 울릉경찰서 경찰병력과 함께 근무했고, 또 대원 중 일부는 경찰에 특채되기도 했다. 1956년 12월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는 경북경찰청 산하 울릉경비대 소속 독도경비대가 독도 수비를 담당해왔다.
세종실록지리지 이후, 씨줄과 날줄로 교직되어온 우리나라 역사 속에 엄존하는 독도. 독도는 이렇듯 우산국 백성으로서 울릉 주민뿐만 아니라 겨레의 정성과 피로서 지켰다. 대지는 생명을 낳아 기르지만, 영토는 생명을 먹고서야 비로소 안존(安存)하는 것이다.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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