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작 영화 리뷰] 해운대

짠 내음 물씬 나는 탄탄한 스토리 '감동 쓰나미'

박찬욱의 '박쥐', 봉준호의 '마더'처럼 감독의 유명세를 등에 업지도 못했고, '해리 포터'나 '트랜스 포머'처럼 전작 시리즈의 후광을 받지도 못했다.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수식어는 품질 떨어지는 그래픽의 어색함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은 아닐지 괜스레 걱정부터 앞서게 했다. 앞서 열거한 영화들은 개봉 첫 날 첫 상영편에서 객석을 거의 채웠던데 비해 '해운대'는 3분의 1 정도를 채우는데 만족해야 했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객석에 앉았던 관객들은 120분이 지난 뒤 환한 표정으로 극장문을 나섰다. 처음 90분가량 웃느라고 정신을 못차렸던 관객들은 나머지 30분간 압도하는 그래픽과 가슴 짠한 감동으로 울다가 웃기를 반복해야 했다.

◆화려한 그래픽을 압도하는 탄탄한 스토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해운대'는 화려한 그래픽으로 무장한 초대형 블록버스터 재난영화가 아니다. 재난영화로서의 재미가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주연급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과 뛰어난 각본 덕분에 재난영화이기에 앞서 훌륭한 코믹 멜로 드라마로 각인된다. 부모도 없이 억척스레 혼자서 해변 식당을 운영하는 연희 역을 맡은 하지원은 워낙에 팔색조처럼 변신에 뛰어난 배우가 아닌가. 앞서 '1번가의 기적'을 통해 철거촌에서 강단있게 살아가는 여자 복서 역할을 근사하게 소화하기도 했다. 연희와 짝을 이룬 만식 역을 맡은 설경구도 연기파로 이름 높지만 '공공의 적' 캐릭터가 워낙 강한 것이 흠이었다. 이번 영화에서는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의리파 부산 바다 사나이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하지만 지질학자로 등장해 쓰나미의 위험을 경고하는 김휘 박사 역할을 맡은 박중훈과 오래전 헤어진 사이인 그의 아내 이유진으로 나오는 엄정화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특히 지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박중훈이 지질학 용어를 내뱉으면서 쓰나미의 위험을 경고하고, 데이터 분석 결과를 보면서 전문 용어를 쓸 때의 어색함이라니. 마치 대본 또박또박 읽어주기를 연습하는 듯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서부경찰서 강력반 우 형사로 등장한 박중훈이 너무도 간절히 그리웠다.

◆영화를 살린 빛나는 조연들의 힘

정작 영화의 주인공은 앞서 두 커플이 아니었다. 만식의 동생이자 해양구조대원인 형식 역을 맡은 이민기와 그를 사랑하는 당돌한 서울 아가씨 김희미 역을 맡은 강예원이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바다에 떨어진 희미를 우연찮게 구조해 준 형식. 생긴 것은 꽃미남 스타일이지만 입에서 부산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순간 분위기를 확 깨버리는 형식과 모든 조건을 갖춘 서울 미녀 희미. 하지만 희미를 좋아하는 돈 많은 건달이 둘 사이에 끼어들고 풋풋한 사랑을 꿈 꾸던 두 사람은 냉랭한 사이로 멀어진다. 어눌한 부산 총각 형식과 다소 되바라진 듯한 서울 처녀 희미와의 사랑 이야기는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자신들의 사이를 갈라놓았던 건달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형식. 구조 헬기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그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숨 죽여 흐느꼈다.

진정한 조연의 역할을 보여준 인물은 덜 떨어진 해운대 동네 양아치 오동춘 역을 맡은 김인권이었다. 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에서 재범 역을 맡았던 김인권은 물 익은 연기력을 보여주며 관객들을 울리고 웃기는 감초 역할을 200% 소화해 냈다. 약간 모자란 듯 하면서도 동네 일이라면 나서지 않는 법이 없는 인물. 연희의 동기동창이며, 2005년 쓰나미가 동남아를 강타했을 때 원양어선에 타고 있다가 목숨을 잃은 연희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고 있는 인물. 자칫 과장된 몸짓 탓에 '영구형 코미디'로 흐를 뻔 했지만 적당한 절제력과 눈빛 연기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누가 봐도 어눌한 인물인데도 스스로는 대단하다고 여기면서 툭툭 내뱉는 대사는 영화의 재미를 한층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밖에 '해운대'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돈만 밝히는 야심가이지만 속에는 따뜻한 인간미를 품고 있는 김억조, 백수로 빈둥거리는 아들이 면접시험 볼 때 신고 갈 구두를 사주기 위해 야유회 버스도 마다하는 어머니, 세상에 돈이면 뭐든 해결된다고 믿는 철부지 청년 등. '해운대'를 덮친 쓰나미는 과연 어떤 사람을 휩쓸고 지나갈까?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꿈

부산 출신으로 '해운대'를 연출한 윤제균 감독은 '쓰나미'에 어울리는 훌륭한 컴퓨터 그래픽(CG)을 만들어냈다. 사실 CG작업은 전문 제작사가 만들지만 업체를 찾기 위한 감독의 노력은 눈물 겨울 정도였다. 한국의 기술력으로 완성하고픈 마음에 국내 CG업체를 모두 찾아다녔지만 마뜩짢았다. 특히 물 CG작업에 대해 책임있는 답을 주지 못했다. 결국 해외 CG업체를 물색했지만 문제는 제작비였다. '해운대' 제작진이 책정한 CG비용은 350만달러. 쓰나미 장면이 15분가량 나오는데 외국업체들은 3천500만달러는 필요할 것이라는 답을 하기도 했다. 아무리 부탁하고 사정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퍼펙트 스톰', '투모로우'에서 물 CG를 맡았던 한스 울릭이 '폴리곤 엔터테인먼트'라는 독립 CG업체를 차린 것. 가뜩이나 힘든 조건임에도, 윤 감독은 한스 울릭에게 한국에 물 CG 기술 이전과 작업시 한국업체와 함께할 것을 요구했다. 정성이 통한 것일까. 한스 울릭은 촬영 시작 4개월가량을 앞두고 함께 작업하기로 동의했다. 다만 물의 핵심 CG작업만 담당하고, 나머지 합성은 한국 모팩 스튜디오가 맡는 것으로 합의했다.

2008년 11월 초 국내 촬영을 모두 마친 제작진은 특수촬영 및 CG 보강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해양구조대원 형식이 헬기를 타고 날아와 바다에 빠진 희미를 구출해 내는 장면과 김휘가 호텔 복도에서 쓰나미에 휩쓸리는 장면, 2004년 연희 아버지가 동남아 쓰나미 속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 등이 한 달가량 촬영됐다. 2004년부터 시작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꿈은 약 2천일 만에 결실을 맺게 된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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