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성주 방향으로 달리다 우측 67번(왜관'하빈) 지방도로 빠지면 육신사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정표를 따라 조금만 가면 아담한 산자락에 포근히 안긴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곳이 바로 충정공 박팽년의 후손인 순천 박씨 집성촌(달성군 하빈면) 묘골이다. 묘골이라는 이름은 독특한 지형에서 유래했다. 묘골은 밖에서 보면 마을이 보이지 않는 묘한 형태를 갖고 있다.
순천 박씨가 묘골에 정착하게 된 배경에는 역사적 아픔이 간직돼 있다. 박팽년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 중 한 명. 죄인으로 몰려 일족이 화를 입을 때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이씨는 임신중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여자 아이를 출산하면 관비로 삼고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명을 내린 상태. 이씨는 고향(하빈) 근처에서 관비 생활을 하던 중 아들을 낳았지만 여종이 낳은 딸과 바꿔 아들의 목숨을 보존했다. 그 아이가 바로 박일산이다. 박일산은 성종 때 박팽년의 손자라는 사실을 조정에 알리고 사면을 받은 뒤 묘골에 정착, 묘골 순천 박씨 입향조가 됐다. 묘골에 사육신을 모신 육신사가 있고 충절의 마을로 이름난 이유다.
한때 묘골에는 300여 채의 집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후손들이 빠져 나가면서 지금은 그 수가 많지 않다. 하지만 순천 박씨 집성촌을 알리는 문화유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묘골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이 충효당이다. 인조 22년(1644) 박팽년의 7대손인 금산군수 숭고가 별당으로 지은 것인데 충효당으로 개칭된 뒤 충'효, 법도를 가르치는 교육 공간으로 사용됐다. 원래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으나 1995년 현재 위치로 옮기면서 누마루를 부설했다.
육신사 정문 조금 못미친 지점에는 도곡재가 있다. 정조 2년(1778) 대사성 박문현이 지은 건물인데 1800년대 달성십현(達城十賢)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았던 도곡 박종우가 재실로 사용하면서 그의 호를 따 도곡재로 불리기 시작했다.
마을 안쪽에 위치한 육신사는 박팽년의 현손 박계창이 사육신을 제사지내기 위해 지은 하빈사가 전신이다. 하빈사는 나중에 낙빈서원이 되었으나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 1974년 육신사라는 이름으로 재건됐다. 정문에 해당하는 외삼문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육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 옛날 현판과 달리 한글 쓰는 순서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씨를 쓴 것이 특징.
육신사 내에는 사육신을 모신 사당과 태고정, 숭절당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 옆에는 박정희'최규하 전 대통령과 박팽년의 후손인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기념 표지석,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비가 있다.
보물 제554호인 태고정은 박일산이 건립한 종택의 정자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종택이 소실되면서 함께 훼손되었으나 1614년에 중건됐다. 보통 정자에 하나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반해 태고정에는 일시루라는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다. 태고정의 건축학적 묘미는 지붕에 있다. 오른쪽은 팔작지붕, 왼쪽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으로 마감한 보기 드문 형태를 띠고 있다.
묘골 마을에는 지금 한옥 신축이 한창이다. 달성군이 묘골을 한옥마을로 가꾸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성군은 2003년부터 올해까지 총 180억원을 들여 사육신기념관을 건립하고 한옥 20여 채를 단장하는 등의 작업을 벌이고 있다. 사육신기념관은 올해 안으로 문을 열 예정이다. 한편 육신사를 방문하면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화관광해설사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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