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존댓말을 가르치자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이런 질문이 있다. "대구 사람들 직업이 뭐예요?" 나이나 직업 등 질문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어 질문 의도도 아리송하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질문일 듯도 한데 어찌 보면 의미를 담은 물음 같기도 하다. '대구사람들은 뭘 먹고 사느냐' 다시 말해 희망이 없지 않으냐는, 다소 비꼬는 말로도 비쳐진다.

대구는 과연 희망이 없는가.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이어 첨단의료복합단지를 유치하면서 대구에도 조금씩 희망의 목소리가 움트고 있다. 굵직한 뉴스의 조명을 받는 대구경북 출신 인사들도 늘어났다. 손안에 쥐어지지는 않지만 뭔가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래서일까 '치아뿌라'를 외치던 자포자기적인 목소리는 조금씩 사그라진다.

어제 이명박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생각도 변방적 사고에서 중심적 사고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G20 정상회의 유치를 계기로 남북은 물론 국제적 이슈에도 우리의 비전과 해법을 놓고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노력하자는 말이었다. 나라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한 말이지만 오늘 대구가 새겨들을 말로 다가온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초임 시절 사석에서 이렇게도 말했다. '국민소득이 2만 불을 넘어 3만 불 4만 불로 나아가려면 먼저 국민의식이 성숙해야 한다. 교통질서에서부터 사회가 정한 규칙을 시민들이 지키고 인정하며 사회적 비용을 줄여야 소득도 높일 수 있다.'

대구를 걱정하는 말로 배타성이 꼽힌다. 남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을 키우지 않는다는 말이다. 서울 사람은 제 살기에 바쁜데 대구 사람은 남의 일 참견에 바빠 말이 많다고도 한다. 그렇다고 대구를 최고로 여기지도 않는다. 서울로 간 사람을 성공한 이로 부러워하며 너도나도 서울로 빨려 들어가려 한다. 굳이 구분한다면 대구는 서울의 변방이다. 변방의 생존 조건은 무엇일까. 중앙은 물론 여타 변방과의 소통이다. 나 홀로는 소외를 불러 온다. 좌절의 시간들 대구가 고스란히 겪었던 일이다. 스스로를 아끼는 만큼 남의 가치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남도 우리를 존중하고 안아준다.

이제 대구에서 올라오는 희망의 싹은 아직 튼튼하지 않다. 스스로의 땀과 정성도 한몫을 했지만 정치적 환경 변화도 부인할 수 없다. 앞으로의 숙제가 적잖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아직도 대구 하면 사과,섬유에 교육도시로 알고 있다. 사과는 이제 구경하기도 어렵고 섬유도 예전 영화를 잃었다. 명성은 바래졌지만 교육은 여전히 대구의 강점이다. 자식 키우기에 쏟는 대구 사람들의 투자는 유별나다. 서울 강남의 교육열도 대구와 경상도 사람들의 결과다. 교육은 그러나 공부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교육에 대구의 희망을 걸어야 한다면 이는 대구 엄마들의 몫이다. 사람을 키우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옳은 교육에는 눈감고 있지만 교육은 대구의 내일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성세대들의 의식과 행동을 바꾸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대신 내일 대구와 함께 살아 갈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어야 한다. 후진을 기르는 것은 재기의 지름길이 아닌가. 대구 사람들의 기질 중 지적받는 대부분은 우선 말에서 비롯된다. 말투가 버릇이 없고 제멋대로라고 한다. 남의 말을 자르고 의사 표현이 분명하지 않고 저만 잘난 체하고 남을 비꼬고 무시한다고 비난한다.

대구 엄마들이여, 우리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가르치자.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존댓말을 쓰듯 집에서도 엄마에게 존댓말을 쓰도록 하자. 존댓말은 우선 겸손하다. 자기를 낮춘다. 나를 낮추니 당연히 남을 존중한다. 말꼬리를 끊을 수 없으니 의사 표시가 분명해진다. 격식을 갖추다 보니 격한 감정을 누를 수 있다.

대구와 대구 사람의 희망은 대구 사람 스스로가 가꾸고 키워야 한다. 그 역할을 대구 엄마들이 맡아야 한다. 의리와 패기의 역동성에 포용과 관용의 겸손을 대구 사람의 정체성으로 만들어 간다면 대구 사람을 싫어할 국민은 많지 않다. 우리 아이들에게 더 이상 배타적 도시 대구의 오명을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徐泳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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