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존재의 무화를 극복하기 위해 영원히 썩지 않을 세 가지를 이루려고 했다. 덕(德) 공(功) 언(言). 이 셋 가운데 하나라도 이루어야 이름이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더불어 선인들은 죽기 전에 스스로 자기의 묘표(墓表)와 묘지(墓誌)를 적었고, 자신을 애도하는 만시(輓詩)를 지었다. 묘표에 운문이 첨가되면 묘비명(墓碑銘)이라고 했고, 묘지에 운명이 첨가되면 묘지명(墓誌銘)이라고 일컬었다. 죽기 전에 자신이 들어갈 무덤을 만드는 풍습은 후한 때부터 생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부터 그런 풍습이 생겼다.
금각(琴恪)은 1569년에 태어나 1586년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그는 죽기 전 스스로 묘지를 썼다.
'봉성 사람 금각은 자가 언공이다. 일곱 살에 공부를 하기 시작해서 열여덟에 죽었다. 뜻은 원해하지만 명이 짧으니 운명이로다.'
묘지치고는 너무 짧다. 열여덟에 죽은 그는 원대한 꿈을 갖고 어려서 공부를 시작했으나 공부를 채 끝내기도 전에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너무 짧은 인생이나 그 또한 운명이라고 했다. 어쩌면 금각은 후대 사람들에게 운명이 이토록 야박하다고 하소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금각은 다만 일찍 죽는 것을 아쉬워한 것은 아니다. 그는 허균 등과 함께 공부를 할 만큼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었다. 요절하는 바람에 그는 타고난 재능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천수를 다한 사람도 있었다. 16년 동안 조정의 대신으로 조야의 신망이 두터웠던 상진(1493∼1564)은 '자명'을 지어 부족할 것이 없었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다.
'시골 구석에서 일어나 세 번 재상의 관부에 들었고 늘그막엔 거문고를 배워 감군은 한 곡조를 늘 타다가 천수를 마쳤노라.'
상진은 집안에 미관말직을 지낸 어른도 없었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이익은 그의 업적이 황희나 허조에 버금간다고 평가했다.
그는 임종 때 자녀들에게 '내가 죽은 뒤 업적이 이렇다 저렇다 적을 것 없이 공이 만년에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여 얼큰히 취하면 감군은 한 곡조를 타면서 스스로 즐겼다고 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위의 '자명'이다.
생전에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을 수장(壽藏)이라고 한다. 그 무덤에 쓰일 묘지명을 미리 작성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생지(生誌)라고 했고, 특히 스스로 생지를 작성할 경우 그것을 자지(自誌)라고 했다.
김주신(1661∼1721)은 30세 되던 1690년 '수장자지'(壽藏自誌)를 썼다.
'내가 죽은 뒤에, 비록 비단옷과 석관으로 싸고 명당 자리에 무덤을 세우더라도 대자산(大慈山)에 장사지내지 않는다면, 파리 떼가 부모님의 시신에 우글거리는 것을 보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에 비해 명주 주머니와 오동나무 관으로 싸서 개미구멍 같은 곳에 두고 흙을 덮더라도 대자산에 장사지낸다면 이곳에 묻힌 것이 즐거울 것이니, 이는 진실로 부모님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근대 이전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묘비명 글쓰기의 양식을 망라하고 있다. 1200년대 김훤에서부터 1900년대 이건승까지 700년 동안 50여명의 선인들이 스스로 남긴 묘표와 묘지, 만시를 통해 우리는 선자들의 삶과 죽음을 엿볼 수 있다.
살아있을 때 죽음을 생각할 줄 알았던 선인들은 사후 세계가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그들은 죽음의 절박함을 알았기에 삶 속에서 진정한 희열을 맛볼 수 있었다. 612쪽, 2만3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