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부](8)봉화 물야 창녕 성씨 종가 강순자 여사

"한 해 제사 13번'''한번도 소홀히 한 적 없어"

사과가 붉게 익어가는 초가을,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아 찾아간 곳은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위치하고 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 계서공파(溪西公派)의 종가다. 계서 성이성(成以性'1595~1664)선생은 춘향전으로 잘 알려진 이몽룡의 실재 인물로 추정되는 분이다. 춘향전의 유명세 덕분에 최근 많은 사람이 종가를 찾고 있다. 방문객들은 한결같이 종부 강순자(67) 여사의 친절함을 이야기한다. 어떤 분이 종가를 지키고 계신지 참으로 궁금하다. 한창 종가를 보수하는 중이라 집안이 어수선하다며 미안한 마음으로 손님을 맞이하신다. 종부의 큰 임무 중의 하나가 접빈객(接賓客)인 터라 손수 만든 감주를 내오신다.

◆ "난 제사 많은 집에 시집가야지!"

"큰집에 제사가 많은데, 제사 있는 날은 엄마랑 큰집에 가는 기라. 따라가면 골목이 요래 있는데, 내캉(나랑) 한동갑 먹은 사촌이 길을 막고 '오지 마!'카는 기라. 유세하니라고. 난 속으로 '난 제사 많은 집에 시집가야지!' 그랬어"

제사 때에는 늘 맛있는 음식이 많아 좋았다던 소녀, 종가의 딸이라고 유세하던 사촌이 얄미워 커서는 꼭 제사가 많은 종가에 시집가고 싶다던 소녀는 창녕 성씨 계서공파의 종부가 됐다.

그의 친정은 진주 강씨(晋州姜氏) 은월공파 종가의 작은집이다. 그런 까닭에 어릴 적부터 제사며, 문중의 크고 작은 일들을 자주 보고 자랐다.

학교를 졸업하고 바느질을 배워 부산 양장점에서 일하던 중, '사람이 참 반듯하고 좋다'는 큰 언니의 소개로 종손인 성기호(79)씨를 만났다. 친정어머니는 종가에 시집가면 고생이 많다며 반대했지만, 양반으로서 자부심이 강하시던 친정아버지의 권유로 스물세살에 '천지도 모르고' '어릴적 꾸어오던 소원대로' 종가집 종손과 혼인했다.

◆ "반지 하나 못 해줘 참 안 됐다"

당시 시댁의 형편이 넉넉지 않았음에도 친정아버지는 "그래, 니 이런 집에 시집갈라 그면, 주머니 쌈지에 밥 싸들고 댕기면서 다녀봐라. 니 이런 집에 시집 올 수 있는가?" 하며 혼인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혼례는 당시 종가에서는 드물게 부산의 한 예식장에서 신식으로 치러졌다.

시집왔을 당시 시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없었다. 그런 까닭에 종부는 시집을 오자마자 곳간 열쇠를 비롯해 모든 제사를 물려받았다. 집안 대소사를 처리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 되었다.

대부분 종가뿐 아니라 여느 시집살이가 몇해를 두고 시어머니에게 이런저런 집안의 법도와 살림살이를 배운 후에야 곳간과 부엌 열쇠를 물려받았지만 종부에게는 남들 이야기였다.

'매서운 시집살이'는 없었지만 종가 살림살이를 철없는 새댁이 결혼하자마자 곧바로 맡아야 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살림을 야무지게 하는 며느리를 시아버지는 참으로 예뻐해 주었다. 마루를 닦고 있을 때면 조용히 옆에 와 "내가 니 반지 하나 몬 해줘 가지고 참 안됐다"라며 미안해 했고 돈을 양말 속에 넣어 놨다가 "고기 쪼매 사다 국 끓여 아 좀 믹이라" 하며 건네주기도 했다. 제사 때에는 늘 "니가 고생한다" 며 위로해 주었다.

"제사 지내는 건 아무 그게(힘든 게) 없어. 제사 지내면 잘 먹잖아."

제삿날에는 온 식구가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처음에는 음식의 종류가 많고 양도 푸짐하게 올라가는 친정과 달리, 나물만 잔뜩 올라가는 시댁의 제사상 차림이 어색했다. 그러나 주위 친척들로부터 가문의 법도를 배우며 차츰 적응해 갔다. 친정에서 봐온 방식대로 제사상을 차리기도 하는데 다른 탕과 함께 조개탕을 하나 더 올리는 것이다.

종부는 손이 크기로 유명하다. 제사상을 차리기 위해 장을 보러 가면 상인들은 과일이든 어물이든 제일 큰 것을 골라 준다. 크고 많이 차려서라기보다 "하나를 올리더라도 제일 크고 좋은 것을 올리는 것"을 중히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유명해진 것 같다.

창녕 성씨 계서공파 종가의 제사는 일년에 열세차례나 된다. 한달에 한번꼴이니 뒤돌아서면 제사 준비를 해야할 정도였다. 여기에다 명절날이나 집안 어르신의 생신상 등 여느 종가 못지않게 대소사가 많았다.

하지만 종부는 단 한번도 어렵거나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접빈객이나 봉제사는 종가 집안의 첫째 덕목인기라. 종부가 그런일을 소홀히 여기면 안되거던"이라며 환하게 웃는다.

◆ 종가 떠난 후 30년 만에 다시 종가로

혼인 후 4년 만인 스물일곱살에 기다리던 첫 아들을 낳았다. 이후 딸과 아들을 낳아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 어려운 가정 형편과 자녀 교육 문제를 해결하고자 종가를 친척에게 맡기고 대구로 이사했다.

작은 방을 세 얻어 시작한 살림살이였지만 열심히 일한 덕분에 집을 사고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켰다. 종가의 옛 땅도 일부 되찾았다고 하니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30여년을 대구에서 살다 3년 전, 종가 건물이 관리 소홀로 허물어져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종손과 종부는 다시 종가로 돌아왔다.

작년에 몸이 아팠다는 종부는 "인자 딴 거보다도 아들 건강이 최고고, 내도 건강하고 다른 건 있겠나?"며 어머니로서의 바람과 좀 더 많은 사람이 종가를 찾아와 가문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종부로서의 희망을 밝히면서 이야기를 마쳤다.

이야기를 마친 후 '口'자 형의 집과 보기 드물게 간이화장실을 갖춘 사랑채, 단청이 아름다운 사당 등 집안 곳곳을 소개하며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종부의 건강한 모습에서 종가에 대한 사랑과 강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한국국학진흥원 박동철 연구원 78creep@hanmail.net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