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 10월의 마지막 날엔…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채 헤어졌지만, 이제서야 알게 된 마음

♥늘 같은 날이지만 왠지 더 쓸쓸

승용차에 올라 라디오를 틀자 모 방송 진행자의 유창한 말솜씨에 이어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이란 가사의 이용의 노래 '잊혀진 계절'을 들으며 가을이 농익어 감을 실감한다.

일찌감치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밥통에서 밥을 푸고 냉장고를 뒤적거리고, 된장찌개를 데우는 등 부산을 떨어 김치랑 두어 가지 반찬에 조촐한 저녁상을 마주하여 앉았다. 늘 같은 날의 연속이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더 쓸쓸한 것 같다. 두어 숟갈 뜬 손에 리모컨을 잡아 텔레비전을 켠다. 한국시리즈 야구가 끝난 지도 벌써 일주일은 족히 지났다. 괜한 짜증에 애꿎은 플라스틱 물컵만이 흡사 옆구리를 채인 똥개처럼 깨갱거리다 개수대 한쪽 구석에 처박혀 조용히 입을 다문다.

처연한 눈동자에 휘둘러보는 눈길이 나도 모르게 전화기에 머문다. 순간 거짓말처럼 벨이 울린다. 화들짝 놀라 받아든 수화기를 통해 대뜸 "지금 뭐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어온다. 반갑다. 이웃하여 사는 10여년 지기 '사회 친구'다. 은연중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냥 "술이나 한잔 합시다"하면 될 것을 그 꼴난 자존심에 "예, 밥묵고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습니다"하는 군색한 대답에 한발 물러설라 치니 입가론 알듯 모를 듯 씁쓰레한 웃음이 번진다.

"시월의 마지막 날 너무 쓸쓸합니다" 하는 말끝에 "술"이란 단어가 나오기 무서웠다. "예!"하는 대답에 바쁜 마음만큼이나 허둥거린 지 몇 분 후, 둘은 지산동 모 술집에 자리하고 앉았다. 둘 다 가을을 타는 추남인 듯 혀끝에 감기는 술이 꿀처럼 달다. 먼저 나온 밑반찬 몇 가지에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은 벌써 몇 순배나 돌았다. 세상사가 입에 오르고 아들과 돈과 학원 따위가 뒤죽박죽 입안서 춤춘다.

문득 낮에 들었던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란 노래 가사가 생각나자 "아, 오늘이 10월의 마지막 밤이구나!"하는 생각에 새삼 뜻모를 미소가 입가로 아름아름 번질 때쯤 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처럼 느껴지는 몇 해 전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못내 아쉬움이 남은 둘이 내년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하자고 손잡아 한 약속이 벌써 햇수로 수년째다. 그리고 그날 밤 "인간 만사가 다 그렇지!"하고 예견이라도 하듯 느지막하게 용지봉 위로 불쑥 솟아오른 그믐달이 횡설수설 휘청거리는 두 사람이 우습다는 듯 깔깔거려 웃느라 입 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이원선(대구 수성구 중동)

♥"아가! 저 가을 하늘 한번 쳐다 보거라"

'오늘은 문득/ 헤이줄넛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닫혀 있던 가슴을 열고 감춰 온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이/ 꼭 한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외로웠던 기억을 말하면 내가 곁에 있을 게 하는 사람/ 이별을 말하면 이슬 고인 눈으로 보아 주는 사람/ 희망을 말하면 꿈에 젖어 행복해지는 사람/ 험한 세상에 굽이마다 지쳐 가는 삶이지만/ 때로 차 한잔의 여유 속에 서러움을 나누어 마실 수 있는/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 배은미 시인의'마음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입니다.

어머니! 저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시집 온 지도 어느새 10년. 결혼하고도 서툰 저의 행동에 한 번도 화내시는 법 없이 너그럽게 다독여주시고 많은 사랑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이 그 사람 생일이네요. 아버지, 어머니 좋아하시는 요리 만들어 찾아뵙고 함께 보내고 싶습니다.

어느 날 문득 제 마음을 보여 드리고 싶을 때 어머니께서는 어느새 눈치를 채시고는 저만 가만히 불러내시어 "아가! 저 가을 하늘을 한번 쳐다 보거라"하시며 저의 어깨를 토닥여 주셨지요. 그 하늘의 빛깔이 얼마나 선명하고 곱던지요.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정서적인 면에서도 제가 따라갈 수 없는 무한한 매력을 발휘하시고 저를 한 번씩 놀라게 만드시는 재주를 가지신 것을 알고 계세요?

어머니! 그이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지금처럼 늘 건강하세요. 하나뿐인 며느리가 올립니다.

노영숙(대구 북구 산격동)

♥내년을 기약하며 나팔꽃 밑둥치 잘라내

올해로 7년째 나팔꽃을 심어 가꾸었다. 식목일을 전후하여 긴 화분 4개에 세모진 까만 씨앗을 물에 불려 다독여 심고 여린 새싹 두꺼운 대지 뚫고 올라올 때 노오란 싹의 신비감에 해마다 감탄한다.

줄 따라 줄기 감아 올라가며 넓은 잎 펼치는 6월이면 남녘 창문이 다 가리도록 나팔꽃으로 가득 채운다. 앙증맞게 꽃봉오리 잉태할 땐 행여 부족할세라 물 주기를 소홀하지 않고 거름 주어 영양분 보충하며 처음 개화한 것은 기념 촬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진보라 둥그런 50여 꽃송이 펼칠 땐 보는 이마다 탄성과 함께 웃음을 쏟아낸다.

어느 친구는 촛불 잔치라도 열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환하게 웃는 나팔꽃 송이송이마다 노래 소리를 담고,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담고, 친구의 그리움도 담고, 살아온 부대낌도 담아보고, 가족들의 건강을 염원하는 작은 소망들을 가득가득 담아보며 바라보는 나팔꽃은 내 생활의 활력소이며 뿌듯한 희망이다 .

활기차게 잘 자란 나팔꽃을 키우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으며, 관심과 사랑의 고삐를 조이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음을 알기에 푸르름이 가득한 창을 바라보는 난 가끔씩 성취감에 전율이 일곤 한다.

하지만 화려함도 때가 있는 법. 입추가 지나고 조석으로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푸르기만 하던 잎들이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하여 10월 하순부턴 잎이 누렇게 변하다 결국 영(靈)잎으로 힘겹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강한 바람이 부는 날엔 힘없이 떨어져 아이들이 밟기라도 하면 헤아릴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나 쓸기도 쉽잖다. 그래도 며칠을 기다려 10월의 마지막 날이면 어김없이 전지 가위로 밑둥치를 자른다.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마음 한 구석에서는 작은 파문과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년을 기약하며 올해도 어김없이 나만의 나팔꽃 인생, 마무리 책무를 다해야지. 10월의 마지막 날에. 신옥남(구미시 도량동)

♥허수아비 축제 여전히 즐거운 추억으로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충남 공주 어느 마을에서 열린 축제가 문득 떠오른다. 도시 생활에서 잘 볼 수 없는, 농촌의 정감을 더해주는 허수아비가 그곳에서는 마을 입구에서부터 반겨주었다. 축제 속에서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는 모습에 더위도 잠시 잊을 수 있고 자신이 만든 허수아비와 사진도 찍으면서 멋진 추억도 만들 수 있었다.

까마귀를 쫓으려면 무섭고 화가 난 허수아비를 만들어야 하는데 밝고 명랑한 우리 아이들은 짚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뜨거운 햇볕 아래 서 있을 허수아비를 생각하면 불쌍하다고 "형아! 허수아비가 하루종일 서 있으면 힘들잖아요. 모자 좀 씌워주세요. 형아! 여기 어깨에 옷도 덮어주세요. 저녁에 춥잖아요. 형아! 발 차가우니까 신발도 만들어주세요"라고 자꾸 보채니 그 순수함만큼은 너무 닮고 싶다.

어릴 적에는 벼농사를 하는 논마다, 시골길을 지날 때마다 본 허수아비를 내년에는 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풍성한 가을 들녘의 정취를 느껴볼 수 있는 허수아비 축제도 좋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직접 짚을 만지고 느끼면서 허수아비를 손수 만들어 세우며, 마음속 따뜻한 추억을 만들고 농촌의 한 부분을 배워나갈 수 있는 하루여서 더 의미있는 날이었다.

농촌에서 허수아비라는 작은 소재를 가지고 큰 기쁨을 얻었고 앞으로도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관심과 애정을 듬뿍 받는 허수아비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류재필(대구 달서구 성당1동)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글을 보내주신 분 중 한 분을 뽑아 패션 아울렛 올브랜 10만원 상품권을 보내 드립니다. 원고 분량은 제한 없습니다. 많은 사연 부탁 드립니다.

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체육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홍대연(대구 서구 평리2동)

다음 주 글감은 '나만의 건강관리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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