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위기의 대구 고교 교육] (3) 사교육 이겨야 학교가 산다

수준별 수업 교사 경쟁력 강화…공교육 살릴 길 있다

1980년대 이후 모든 정부의 목표는 사교육비 절감이었다. 대통령과 교육 담당 장관들은 입버릇처럼 가정의 사교육비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을 펴겠다고 되풀이했다. 정책의 이름과 방법만 달랐을 뿐 목표는 한결같았다. 그러나 사교육비 지출액은 해가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었고 가정경제에서 사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꾸준히 높아져왔다.

학벌과 간판을 중시하는 사회 풍조가 심화된 탓도 있지만 교육계 내부로 보면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공교육의 경쟁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된 데 있다. 학교에 아무리 예산을 쏟아부어도, 교육과 입시 정책을 아무리 학교 중심으로 맞춰도, 교육대와 사범대 입학생들의 수준이 최고로 높아져도 공교육에 대한 만족도는 높아질 줄 모른다. 대구 고교들이 풀어야 할 문제의 출발점도 같은 선상에 있다.

◆수준에 맞춰 수업한다

수능 성적과 대입 결과가 빼어난 고교들을 취재한 결과 예외 없이 적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수준별 수업이었다. 중학교 내신성적이 적어도 10% 이내에 들어가는 우수 학생들만 입학하는데도 그 작은 수준 차이를 다시 구분해 학생들 개개인의 실력에 가장 맞는 수업을 제공하려는 노력이다.

지난달 찾아간 울산 현대청운고. 쉬는 시간이라 복도에 학생들이 가득했다. 마침 수학 수업을 앞둔 학생들은 자기 교실을 찾아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2학년 한 여학생에게 수준별 수업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1학년 1학기 때 최상위 반에 못 들어갔는데 자존심이 너무 상했어요. 수업을 받아 보니 그 반도 만만치 않아 풀이 죽었죠. 중학교에서 수학이라면 남에게 뒤져본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나중에 반별 수업 수준이 약간밖에 차이가 안 나는 걸 알고 힘을 내서 공부해 반을 옮겼어요."

조진현 입학관리부장은 "학생 개개인의 수업 집중도와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수준별 수업은 불가피하다"며 "교사와 학생의 눈높이가 같다 보니 모두가 수업의 주인이 된다"고 말했다.

안동 풍산고는 한 학년이 3개 학급으로 학급당 30명이다. 1, 2학년은 영어와 수학 수업을 수준별로 진행하는데 3개 반이 아니라 5개 반으로 나눈다. 수준을 더 세분화해 반 인원을 15~20명으로 줄이는 것이다.

윤영동 교장은 "수업 여건은 학원 못지않게 만들고 수업의 질은 학원보다 높이기 위해 영어와 수학 교사를 학교 부담으로 각각 2명씩 추가 채용했다"며 "중간·기말고사 후로 연 4회씩 반을 새로 편성하기 때문에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들에 대한 평가의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7차교육과정이 처음 도입된 2000년부터 수준별 수업을 강조하며 각급 학교에 권해 왔지만 교실 수 부족, 교실 이동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외면하는 학교가 대다수다. 우수 학교의 노하우를 배우려는 자세가 절실하다.

◆학생이 교사를 선택한다

'교사의 경쟁력이 교육의 경쟁력'이라는 교육계의 격언이 있다. 교사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상호 경쟁을 통해 발전하느냐에 따라 교육의 질이 달라진다는 의미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교사가 먼저 경쟁의 대열에 서야 한다. 학생들만 경쟁으로 내몰아서는 신뢰받기 힘들다.

우수 학교들의 또 하나 공통점은 정규 수업 이후에 실시하는 보충수업이나 특강을 철저히 학생들의 선택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현대청운고의 경우 2개월 단위로 진행하는 방과 후 수업은 교사들이 제안서를 내는 데서 시작된다. 수업 할 부분 또는 단원을 정하고 수업 계획을 상세하게 짜서 게시하면 학생들은 이것을 보고 자신에게 필요한 수업이나 원하는 교사를 선택해 수업을 받는다.

조진현 입학관리부장은 "과목과 단원을 세분화해 학생들이 꼭 필요한 부분만 보충할 수 있도록 연 6기로 나눴다"며 "6명 이상의 학생이 선택해야 수업이 개설되는데 제안서를 낸 뒤 학생들의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교사들로서는 대단한 부담"이라고 했다.

학생 선택제의 전제 조건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다. 교실 여건이나 교사 수를 고려하면 모든 학생이 참여하기 어렵기 때문에 원하는 학생만 듣도록 해야 한다. 특정 수업을 선택하는 학생이 많을 경우 참여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다음 기회를 약속하거나 다른 교사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3년 전 대구 일부 고교에서도 방과 후 수업을 학생 선택제로 전환하려 시도한 고교가 여럿 있었다. 당시 이들 학교는 학생들의 폭발적인 인기와 주변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모든 학생이 참여하도록 하는 등 학생 선택제의 전제조건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상 시작하고 난 뒤 교사들에게 닥치는 후유증이 예상보다 큰 것도 걸림돌이었다.

참여했던 한 고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청을 받고 보니 금세 정원이 마감되는 수업이 있는가 하면 인원이 모자라 개설을 못한 경우도 적잖았다"며 "참여 교사에 대한 인센티브나 수업 준비 배려 등도 없이 교무실 내 갈등만 부추긴다는 비판이 많아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고 말했다.

◆스스로 공부하게 만든다

공주한일고 신입생들은 입학한 뒤 100일 동안 집에 보내주지 않는다. 학생들은 '사교육 때 벗기는 기간'이라고 했다. 모두가 수준 높은 학생들이라 경쟁이 치열하지만 정규 수업과 방과 후 특강 외에는 혼자서 또는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른바 자기주도적 학습 습관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최용희 입학관리실장은 "입학 초기 학원에 다니며 공부하던 습관이 남은 학생들은 집에 보내면 짧은 시간에도 학원 특강이나 과외를 청해 듣고 온다"며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는 게 몸에 밸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는 셈"이라고 했다.

이렇다 보니 학생들 사이에 서로가 서로에게 교사가 돼 가르치고 배우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한 학생이 모든 과목 모든 단원을 가장 잘 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럿 중에서 필요한 부분을 가장 잘 하는 한 명이 교사가 되는 것. 대구 상원중 졸업 후 한일고에 진학한 2학년 한현희군은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익숙해지니 친구들에게 물어보는 게 훨씬 편하고 내 눈높이에서 설명해주니 이해하기도 쉽다"며 "각자가 특정 분야에서는 선생님 못지않은 실력을 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현대청운고는 아예 학생들이 서로 가르치는 상호 과외를 제도화했다. 매주 수~토요일 오후 8시 40분부터 10시까지 이런 학생들이 특별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 프로그램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상호과외제도가 가장 좋은 프로그램으로 뽑힐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서로 가르쳐주기 어려운 부분은 아예 동아리를 만들어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기회를 갖기도 한다.

한일고 최용희 실장은 "공부의 방향을 스스로 찾게 되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자신감이 생기고 이후로는 학습 방법이나 내용 등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학교의 역할은 학생들이 학원에 뺏긴 자기주도성을 되찾아주고 지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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