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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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의 희망 목소리

막내 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최태호씨.
막내 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최태호씨.
비산 2·3동 김홍찬·황일순씨 부부.
비산 2·3동 김홍찬·황일순씨 부부.
아픈 막내아들과 함께 사는 정복순 할머니.
아픈 막내아들과 함께 사는 정복순 할머니.
동갑내기 이웃인 박양부·정용웅씨.
동갑내기 이웃인 박양부·정용웅씨.

"사는 게 힘이 부친다. 가난 때문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건 답답한 현실뿐. 외로움은 더욱 떨쳐내기 버겁다. 지겨운 그늘에서 언제쯤 벗어날까. 탈출구는 보이지 않고 희망은 잃은 지 오래다. 또 하루가 지나간다. '죽지 못해 살아….' 입술까지 차오르는 말. 그래도 숨쉬고 살아보자고 자신을 다그친다. 내일이 또 있기에. 그래, 삶이다."

세상은 결코 공평치 않았다. 가난한 자에게 희망의 빛은 연명(延命)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인생역전의 꿈조차 꾸지 않았다. 언감생심이란 말만큼 딱 들어맞는 표현이 있을까. 누굴 탓할 수도 없다. 그저 운명이라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지도. 연말, 찾아나선 대구의 극빈자(極貧者)들의 현실은 더욱 가슴을 내리눌렀다. 그렇다고 하소연만 할 수 없다. 절망의 끝에서도 희망은 싹튼다고 하지 않던가. 기적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혹시 알까. 세밑 가난한 이들의 사정을 살피는 하늘이 측은지심이라도 가져줄지. 우리 주변에서 가난을 이고 살아가는 이들의 희망섞인 목소리를 들어봤다.

◆'파지 1만원, 월 10만원'의 삶

대구 서구 비산 2·3동 한 빈촌에는 김홍찬(62)씨와 정복순(83)씨가 이웃해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역설의 웃음을 알고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푸슈킨의 시처럼. 무슨 희망이 있을까 궁금했다. 그 답은 '파지 1만원과 월 10만원'에 있었다.

전세 700만원짜리 슬레이트 집. 네 식구가 살고 있다. 김씨의 부인 황일순(47)씨와 자녀 둘. 모두 정신지체장애를 앓고 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현실. 기초생활수급자로 매달 받는 60여만원과 김씨가 파지를 주워 손에 쥐는 하루 5천원이 수입의 전부다.

그래도 김씨는 당당하게 새해 희망을 얘기했다. "파지 수입이 1만원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요즘엔 파지 찾기가 힘들지만 내년에는 운좋게 더 많이 주울 수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그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웃을 때의 표정은 말간 캔버스를 옮겨 놓은 듯 맑다. 기분이 좋아진 김씨는 어릴 때 얘기를 들려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성적표를 받으면 모두 '양' 또는 '가'였는데 어쩌다 '미'가 1개 있었어요. 그게 제가 배운 전부예요."

정복순 할머니는 막내 아들(49)과 6.6㎡(2평)도 채 되지 않는 단칸방에 살고 있다. 팔순을 훌쩍 넘긴 고령인데도 아들은 어머니 그늘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당뇨병에 걸려 제대로 거동조차 불편한 상태. 한달 생활은 기초생활수급자로 받는 30여만원이 전부다. 월세가 한달에 5만원. 전기·수도세 1만5천원을 제하면 20여만원으로 연명하고 있다.

그래도 정 할머니는 팔순 노인인데도 아주 곱다. 곱다는 말에 수줍어하는 모습이 소녀같다. 희망이 뭐냐고 묻자 "뭐 있능교, 그저 매달 누가 10만원만 더 주면 좋지"라고 했다. "불편한 거 없어요. 이래 사는 게 내 팔자인데 우짤끼고."

◆'보일러 실컷 때고픈' 두 노인의 하루

"보일러 좀 넉넉하게 때준다면야 그것으로 족하지. 더 바랄 게 있겠어."

중구 성내3동 서야여인숙에서 기거하는 동갑내기 노인 박양부·정용웅(69)씨의 올겨울 작은 바람이다. 기초생활수급자로 받는 25만원과 파지나 병을 주워 마련하는 돈이 수입의 전부. 고작해야 30만원 남짓이다. 15만원 방세를 내고 나면 보일러 원없이 때기가 힘든 게 눈앞의 현실. 두 사람은 모두 "정부에서 매달 40만원 주면 소원이 없겠어…"라며 한목소리를 낸다.

박씨는 이곳 여인숙 단칸방에 18년째 유숙하고 있는 터줏대감 격. 정씨는 내년이면 10년차 중고참이 된다. 둘은 오갈 데 없는 노인이 지내기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박씨는 "그나마 나는 조그만 냉장고 하나를 갖고 있어 부자인 셈"이라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화장실과 세면장은 공동으로 쓰고, 음식은 방안에서 각자 해먹는다. 방 한켠에선 행색이 흐트러진 한 노인이 나와 반갑다고 인사했다. 인사하고 돌아서자 방에 켜켜이 쌓아놓은 소주병이 눈을 찔렀다.

◆삶도 가볍게 하는 희망을 꿈꾸며

동구 신암동의 최태호(47)씨는 늘 하늘에 비는 소원이 한 가지 있다.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헤매는 아내가 정상으로 되돌아 오는 것.' 우울증을 동반한 아내의 알코올 중독 때문에 집안은 위태롭기만 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씨는 6년 전 집수리를 하다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그때 후유증은 지금도 최씨를 괴롭히고 있다.

아이들은 딸만 넷. 맏이는 돈 번다며 집을 나간 지 오래다. 최씨가 불편한 몸으로 내년에 고등학생이 될 둘째, 중학생이 될 셋째, 초교생인 막내 딸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그는 "다른 게 뭐 있겠어요. 집사람이 술만 끊는다면야 더 바랄 게 없지"라고 했다. 그러나 희망의 메아리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그냥 마음에 담아두는 간절한 바람일 뿐.

한 해가 저무는 연말, 삶의 비탈길에 서 있는 가난한 우리 이웃들의 어깨에도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면 삶이 그리 외롭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무거운 삶도 가볍게 하는 게 희망이니까.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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