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은 대구사람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다. 그러나 40, 50년 전까지 팔공산에는 산나물 캐는 사람과 땔감 줍는 사람 외에는 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울긋불긋하게 차려입은 등산객은 언감생심이었다. 거기 산마을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개울물 길어 아침상 차렸고, 녹슨 철 칼 갈아 면도기로 썼다. 비누도 없고 '구리무'도 없었다. 라디오도 전기도, 자동차도 순환도로도 없었다.
거기(동화지구 일대) 열대여섯 가구 사람들은 오직 산에 기대어 살았다. 외지 나들이라도 하려면 15리를 걸어가 공산동과 대신동을 하루 네번 오고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대구사람들에게 '팔공산 동화지구'로 잘 알려진 위락지는 그런 장소였다.
김태락(72)씨가 대구시 동구 도학동(팔공산 동화지구 구상가)으로 들어온 것은 1954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경북 영천 금호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는데, 밥술이나 먹는 집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 피란민 트럭이 정미소 동력이던 엔진을 빼 가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었다. 전쟁이 끝나고 살길이 막막했던 아버지는 솔가해서 동화사 아래에 판잣집을 짓고 그 앞에 좌판을 내놓고 기념품을 팔아 생계를 이었다. 동화사를 찾는 신도들과 관광객을 고객으로 하는 가게였다. 팔공산 동화지구 상가의 시작인 셈이다.
제천제 등 온통 山 생각뿐
중학생이었던 김태락씨는 평일에는 지게 지고 산에 나무하러 다녔고, 휴일에는 기념품 가게를 지켰다. 그는 평생을 팔공산에서 살았다. 폭설로 고립되는 바람에 생필품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고, 비가 많이 내린 날 뒷산에서 바위가 굴러 아찔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장마로 계곡물이 쏟아지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위가 구를 때면 '이렇게 세상이 끝나는 것인가' 싶은 공포에 질리기도 했다. 맹독을 지닌 까치독사가 우글대는 산은 어디나 지뢰밭이었다. 요즘은 일부러 찾아도 까치독사를 찾기는 힘들다.
그랬거나 말거나 김태락씨는 팔공산에서 평생을 살았다. 거기서 자랐고, 부모님을 모셨고, 자식 넷을 대학공부까지 시키고, 시집 장가도 보냈다. 그에게 팔공산은 '은혜로운 산'이다. 김태락씨는 이제는 자신이 산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했다. 그가 팔공산 쇠말뚝 뽑기, 제천제, 주봉 이름 찾기, 6'25전쟁 및 월남참전유공기념비 건립, 2011년 세계육상경기대회 유치 기원제 등을 비롯해 팔공산을 가꾸고 지키는 일에 정성과 비용을 쏟아온 것은 은혜를 갚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순환도로와 팔공산 송이
1980년대 초반까지 팔공산에는 순환도로가 없었다. 지금의 순환도로는 옛날 선비들이 과거시험 보러 오고가던 길이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온전한 길이라기보다 사람 다니는 흔적만 있던 산길 정도였다. 이상희 전 대구시장 시절 여기에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를 기획했다. 기획에 앞서 이상희 전 시장은 이 산길을 두번이나 걸었다고 한다.
팔공산 순환도로는 당시까지만 해도 이례적으로 교통 목적이 아니라 드라이브 목적으로 건설된 도로였다. 도심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산속 길을 달리며 풀자는 의도였다. 이상희 전 시장이 이것을 기획했고, 또 문희갑 전 시장은 길가에 단풍나무를 심어 산길의 흥을 더했다. 대구사람들이 단풍 구경하러 속리산이나 내장산까지 가야 하는 불편을 덜기 위해서였다.
"예전엔 네 산 내 산 구분없어"
김태락씨는 "이 도로는 아주 훌륭한 드라이브 코스가 되었다. 지금도 단풍이 곱지만 날이 갈수록 나무가 자라니 머지않아 대구에서도 속리산이나 내장산의 단풍 못지않게 고운 단풍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태락씨는 어린 시절부터 팔공산을 오르내렸다. 땔감을 주우러 다녔고, 철마다 나는 산중과일을 따러 다니기도 했다. 송이도 전문적으로 채취했다. 그는 "예전에 팔공산 송이는 산주인이 한 차례 따 먹고 나면 동네 사람 누구라도 따 먹을 수 있었다. 내 산, 네 산 구분이 없었다. 산에서 나물 캘 때 내 산이니 네 산이니 구분하지 않는 것과 같다. 50년 전만 해도 송이 5근을 줘야 쇠고기 1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만큼 송이를 먹는 사람이 적었다"고 했다.
송이를 두고 이웃간에 고성이 오고가고 눈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일본으로 수출되면서부터라고 했다.
"송이값이 갑자기 천정부지로 오르고, 서로 캐서 팔려고 하다 보니 다툼도 발생했어요. 그때까지는 송이를 별로 쳐다보지 않던 사람들도 가을만 되면 기를 쓰고 송이 한 송이쯤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
김태락씨는 "송이는 향으로 먹는 음식이지, 무시래기처럼 배불리 먹는 음식은 아니다. 비싼 송이를 많이 먹으려고 하니 값도 덩달아 오른다. 그저 맛보는 정도로 생각하면 서로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팔공산 시설지구
팔공산에는 크게 3곳의 공원시설지구가 있다. 동화사 인근의 동화지구, 갓바위 지구, 파계사 지구다.
김태락씨가 사는 동화지구는 원래 동화사 입구(동구 도학동)에 즐비해 있던 작은 점포들을 1980년대 중반 철거해, 케이블카가 있는 동구 용수동(현재의 동화시설지구)으로 옮긴 것이다. 원래 이곳은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던 태정골로 16가구가 살고 있었다. 대구시의 공원 재개발 정책에 따라 원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개발한 땅이다. 1985년 케이블카가 건설됐고, 상가들은 1987년부터 입주를 시작했다.
대구시가 126필지를 마련하고 분양했지만 현재까지 65개 상가가 들어섰다. 동화사 아래 형성돼 있던 45개 구상가 중 5가구가 현재의 용수동으로 옮아왔고 나머지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현재 형성된 동화지구 65개 상가는 대부분 외지인이 입주한 것이다.
동화지구는 지금까지 2차례에 걸쳐 재개발됐다. 1차 개발은 1962년으로 당시 판잣집 형태였던 점포를 뜯어 시멘트 건물로 된 45채의 구상가를 형성한 것이다. 2차 재개발은 1980년대 중반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을 말한다. 김태락씨는 1차 재개발 사업 당시 25세의 나이로 동네 반장을 맡아 재개발 사업을 했고, 2차 재개발 당시에는 재개발 추진위원장으로 대구시 발전과 주민 이익을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테마 개발 즐길거리 만들어야
"2차 재개발 당시 대구시는 열린 자세로 주민들 의견을 들어주었어요. 우리도 억지를 부리지 않고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했지요. 재개발 사업은 마찰이 많기 마련인데, 당시에는 양쪽이 매우 협력을 잘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재 동화지구 65개 상가 중 13곳이 빈집이다. 그만큼 장사가 덜 된다. 김태락씨는 그 이유를 '테마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구시가 적극 나서서 특성에 맞는 즐길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테마 개발은 이 지구 상인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즐길거리가 부족한 대구시민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단오제 부활, 팔공산 상징물인 봉황상 제작, 다양한 이야기 만들기 등이 좋은 예라고 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중봉.비로봉.제왕봉… 제각각 불리는 主峰 "제이름 찾아줘야"
산에 안개가 끼면 길을 잃기 십상인데, 팔공산은 늘 안개가 낀 듯 가물가물하다. 우선 팔공산 주봉의 이름이 제각각이다. 좌우에 동서봉을 거느려 '중봉'이라 불리더니 '비로봉'으로 가닥을 잡는 듯했다. 그러나 김태락씨를 비롯한 현지인들은 비로봉이 아니라 '제왕봉'이라고 한다. 또 동봉이 아니라 '미타봉', 서봉이 아니라 '삼성봉'이라는 것이다.
"공산은 신라 오악 중 중악으로 신라 때는 왕이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중사(中祀)를 올렸고, 조선시대에는 고을 수령이 제를 모신 천제단이 있다. 최정상에 제천단이 있어 산자락 사람들은 예로부터 제왕봉으로 불렀다."
김태락씨는 "팔공산 북 사면쪽(경북 군위쪽)에서 보면 제왕봉과 미타봉, 삼성봉이 보이지 않는다. 그쪽에서는 또 다른 2개의 봉이 보인다. 그쪽에서는 그 중 하나를 장군봉, 다른 하나를 비로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며 "아마 거기서 오해가 생긴 게 아닐까 짐작한다"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각종 행사 때는 주체에 따라 비로봉 혹은 제왕봉, 그도 아니면 제왕봉과 비로봉 병기 등 제각각이다. 또 거기 제천단이 있음이 알려지면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제천단에서 제를 올리는 단체도 있다. 사람들이 밟을 때마다 흙이 흘러내려 제천단 주변의 돌축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축대를 보강해야 할 자리에 철망을 둘러쳐 보기 흉할 뿐 아니라 신성한 자리에 대한 예의에 어긋난다'는 불만 섞인 의견도 있다.
주 능선의 길이도 오리무중이다. 경북도 조사 보고서는 29km라 하고, 대구시 조사 보고서는 20km라고 한다. 파스칼 백과사전은 16km라고 한다. 시점과 종점을 기록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다.
틀린 지명도 많다. 2만5천분의 1축소 지도는 동화사 양진암을 양전암(養殿庵)으로 바꿔 표기하고 있다. 10만분의 1축소 지도는 신녕천을 신념천, 청통천을 정통천, 사창천을 사상천 혹은 사장천, 성전암은 성진암으로 쓴다.
한자를 잘못 읽은 경우도 있다. 대구 백안동을 지나 와촌으로 가는 길의 왼편 산줄기 끝에 있는 명마산은 조마산, 오마산으로 왔다갔다 한다. 명(鳴)자가 조(鳥)로, 오(烏)로 가 버린 것이다. 부계(缶溪)는 악계(岳溪)로 읽히기도 하고 지묘천(智妙川)은 지사천(智沙川), 오계산(午鷄山)은 우계산(牛鷄山)이 돼 버리기도 한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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