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거리를 걷다가 구세군 종소리에 움찔합니다. 벌써 세밑이 된 모양입니다. 지갑을 열어 집히는 대로 자선냄비에 넣습니다. 그런데 왠지 허전함이 있습니다. 미안함과 개운치 못한 여운이 남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종소리에 반응하는 모습이 마치 호각 소리에 길들여진 애완동물처럼 맹목적인 것이어서 그럴까? 그래서 스스로 민망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돈을 넣고 돌아서는 순간까지도 도움 줄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막연히 나보다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일 거라는 기대와 자기만족이 고작이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배 부르다고 춥고 없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 대부분은 참으로 무심합니다. 불과 60년 전 우리도 똑같은 경험을 겪었으면서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잊고 지냅니다. 아직도 태어나는 순간 전쟁이 일상이 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슈미르, 예루살렘, 그루지야 등 분쟁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사람이나 차량이 지나가면 '탕탕' 손가락 총을 쏴대는 아이들의 손에 들린 장난감도, 놀이도 전부 전쟁과 관련된 것뿐입니다. 팔 하나 다리 하나 없는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 더 어색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안석호 기자가 쓴 『분쟁 기행, 우리는 분쟁을 모른다』(공감, 2009)를 보면 그 참혹한 현실이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 간에 영토 분쟁이 진행되고 있는 카슈미르 지역, 아직도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촉발된 유혈 충돌로 4만4천명이 숨졌고, 인근 파키스탄에서는 2006년 657건의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9.11테러 후 배후로 지목된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과 그 추종 세력이 카슈미르에 숨어든 것으로 보도되면서 군인들이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005년 대지진이 발생해 7만명 이상이 숨지고 33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경제가 피폐해지자 젊은이들은 무장 세력의 유혹에 현혹되어 집을 떠났고, 80만명에 달하는 전쟁 고아들과 노인들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부로부터, 세인의 관심으로부터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의 발라코트시에 거주하는 모하마드 아브잘(60)의 하소연입니다. "대지진 직후 벌떼같이 찾아와 그렇게 호들갑을 떨던 전 세계 기자들에게 우리는 너무 쉽게 잊혀졌습니다. 이제는 파키스탄 언론조차 오지 않습니다. 그동안 이곳은 구호물자 분배와 관련해서 부패와 비리로 얼룩졌는데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어요. 국제사회 지원금의 10%도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돈 있고 연줄 있는 사람들이 구호금을 타 먹고, 우리처럼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은 구호품은커녕 난민촌을 벗어나지도 못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지진이 가져온 변화와 희망도 있다고 합니다. 지진이 일어나자 카슈미르 지역에서 분쟁을 벌이던 인도군 병사들이 공격을 멈추고 희생자 구호작업에 나섰는데 그 소식이 전해진 이후 양국 관계에 훈풍이 불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의 헌신적인 노력도 적대감을 완화시켰습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지원활동도 돋보였습니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만세라 상업대학교에 205만달러(약 20억원)를 들여 새 강의동을 지어주고 직원을 파견해서 지원 사업을 도왔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 정부도 2004년 카슈미르 평화협상에 착수했습니다. 실크로드의 부활을 알리는 '평화의 캐러밴'이 양국 사이를 운행하면서 양측 이산가족을 실어 나르게 되었습니다. 파키스탄의 라호르와 인도의 뉴델리를 연결하는 '우정의 열차'(삼자타우)도 개통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소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은 원래부터 따스한 곳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경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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