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호텔리어의 역사 다시 쓰다…호텔 총지배인 강숙현 씨

경리에서 지역 첫 여성 총지배인까지

여상을 졸업하고 호텔에 발을 들여놓은 후 28년 만에 지역 특급호텔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총지배인에 오른 강숙현 영업이사.
여상을 졸업하고 호텔에 발을 들여놓은 후 28년 만에 지역 특급호텔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총지배인에 오른 강숙현 영업이사.

"남다른 열정과 긍정적인 사고로 생활하면 분명 꿈은 이루어집니다."

수년 전 어느 TV방송에서 20부작 드라마 '호텔리어'가 인기리에 방영됐다. 한류스타 배용준과 송윤아, 김승우, 송혜교 등 인기탤런트들이 출연하여 호텔경영권 다툼에다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호텔리어들의 치열한 세계를 그려 재미를 더했다.

바로 그 TV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호텔리어의 꿈을 움켜잡은 '파워 우먼'이 있다. 구미 K특급호텔 영업이사 겸 총지배인 강숙현(46)씨. 거창에서 여상을 졸업하고 호텔 말단 경리직원으로 입사해 28년 만에 지역 특급호텔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총지배인에 오른 주인공이다. 열정과 긍정으로 일궈낸 인간승리, 그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여상 졸업생 호텔경리가 되다

K특급호텔 영업이사 겸 총지배인 강숙현씨는 거창의 명승 수승대가 있는 위천면에서 태어났다. 전매청 공무원으로 재직중인 부친 아래 4남 3녀 중 3녀. 어릴 적 그녀의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엄한 부친은 "여자애는 타자 잘 치고 주산이나 잘 놓아 여상 가서 경리로 취직하는 것이 최고"라면서 주산을 배우도록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주산 1급 자격증을 따 위천면내에서는 주산 1등이었다.

자연스레 거창 대성여상에 입학했고 참한 여상 3년이 되었다. 졸업반 시절, 당시 거창 출신 대구 로얄호텔 사장이 고향 출신 직원을 채용하겠다며 학교로 추천의뢰를 해왔다. 강 이사는 3학년을 한 학기를 남겨둔 1982년, 동기생 360명 중 1등으로 로얄호텔 경리로 취직했다.

호텔에 취직되자 부친은 못마땅해했다. 당시만 해도 호텔을 숙박업소 정도로 생각하고 실눈 뜨고 보던 시절. 강 이사는 "학교에서 추천한 곳이 그렇게 나쁜 곳이겠느냐"며 아버지를 설득하고 매달린 끝에 거창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일단 대구에 입성했지만 졸업도 않은 18세 소녀에게 직장생활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시 대구 중앙통에서 마주보고 있던 대구은행 본점 건물을 건너다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은행은 오전 9시가 되어야 셔터가 열리고 오후 5시면 문을 닫았다. 그에 비해 하루 12시간씩 힘든 근무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초라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1년여 만에 로얄호텔에 사표를 던지고 새로 문을 연 금융기관에 취직했다. 그러나 애초 주산을 잘 놓는 것 하나로 여상에 들어갔을 따름이고 수리에는 밝지 못했다. 당연히 적성에 맞을 리가 없었다. 하루는 출입금 결산을 하는데 80원이 모자랐다. 검산에 재검산을 거듭하는 사이 시계는 오후 11시를 훌쩍 넘겼다. 퇴근을 하지 못하고 있던 뒷자리의 계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결국 그 일로 은행 생활 3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당시 3개월은 내가 지금까지 호텔 생활을 하는 데 큰 밑천이 되었어요. 만일 그렇게 겪어보지 않았다면 어딘가 더 좋은 곳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결국 도중하차하고 말았겠죠."

◆호텔리어 직급을 만든 여성

강숙현 이사에게는 별명이 세 가지나 있다. 먼저 '강정'이다. 어려움 앞에서는 단단해지고 따뜻함 앞에서는 풀어지는 성격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둘째는 바퀴벌레.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아랫사람들이 붙여준 닉네임. 퇴근한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튀어나오니 징그러울(?)밖에. 셋째 강 정보. 호텔 내 돌아가는 상황에 누구보다 정확하고 빠르다. 정보에 정통하지 못하면 자기관리가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 지론이다.

강 이사가 호텔 근무를 시작하던 때만 하더라도 호텔 여직원들은 직급이 없었다. '아가씨' 때 몇 년 근무하다가 결혼하면 그만둬버리니 승진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러나 강 이사는 3년 안에는 퇴직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주임에 올랐다. 그것은 지역 호텔업계에서 일대 사건이었다. 대구 첫 여성 주임이 탄생하니 다른 호텔에서도 여성 직원들에 대해 승진 기회를 부여하게 되었다.

호텔 업무에 열성을 보이는 만큼 자연히 강 이사는 업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대구의 알 만한 기업의 회장님은 입맛이 없을 때면 꼭 강 이사를 찾아와 그녀가 추천하는 식사를 했다. 그 때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보통 사람들이 하는 승진을 두세 단계 뛰어넘어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때는 직장을 옮겨 행사 메인호텔인 수성관광호텔에서 일했다. 나중 일이지만 2002월드컵과 2003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는 다시 메인 호텔 인터불고에서 행사를 치르는 행운을 잡기도 했다.

물론 그 중간 휴식기와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이 서른에 결혼하고 아이를 가졌을 때는 일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3년을 쉬고 난 다음 다시 직장을 그랜드호텔 주임 자리로 옮겨 출근했다. 그러나 가사와 직장을 병행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남편도 직장에 매달리는 아내를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마음을 먹으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그녀를 말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강 이사는 한 술 더 떴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자신의 학력에 한계를 느껴 36세 되던 해 산업정보대에 입학했던 것. 전문대학 과정을 마친 그녀는 내친김에 다시 경운대 국제관광학과에 편입학해 졸업했다.

"요즘 신입직원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했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현장 경험이 많더라도 전문학교 나온 상사가 지시하면 '저거 맞나?'하는 식으로 떨떠름한 표정이에요. 그래서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더라고요."

◆"엄마는 가정용이 아닌 산업용"

저돌적인 도전으로 그녀는 결국 지난해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하고 싶은 일은 하고야 마는 성격은 볼멘소리하는 남편까지 완전 무장해제시켜 버렸다. 밤잠을 아껴 일과 공부에 매달리니까 남편도 이해해주고 이제는 든든한 조력자가 된 것. 남편의 외조를 바탕으로 그녀는 또다시 박사과정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내 생을 찾는다는 것이 한편으로 아이한테는 미안한 일이죠. 그러나 아이에게 선언할 수밖에 없었어요. 엄마는 어차피 '가정용'이 아니라 '산업용'이라고. 마침 아이도 친한 친구들 엄마가 모두 커리어우먼이다 보니 오히려 좋아하고 잘 이해해주니까 고마운 일이죠."

강 이사는 본인의 말마따나 '산업용'이 틀림없다. 만일 지인들에게 연하장을 보낸다면 1천장으로도 모자란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다. 언뜻 펼쳐보이는 강 이사의 하루 일과는 초인적 능력을 요구하는 스케줄로 빽빽하다. 오전 6시 50분, 대구 집을 나서면서부터 오후 8시까지는 숨 돌릴 틈 없이 돌아간다.

K호텔은 한국관광공사가 세운 뒤 적자를 면치 못해 18년 동안 문을 닫았다가 현재의 경영진이 올해 5월 인수, 새롭게 단장했다. 모습을 일신한 호텔은 '전 국민이 하루쯤 머물고 싶은 호텔'로 만드는 게 지상목표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하루 일과일 수밖에 없다. 총지배인으로서 행사 관리는 물론 찻잔 하나까지 꼼꼼하게 챙겨야 하기에 종일 호텔 안을 맴돈다. 그녀의 세심한 관리 덕분에 K호텔은 새로 문을 연 호텔답지 않게 정돈되어 있고 분위기도 아늑하다.

그러면서 강 이사는 매주 목요일 하루 세 시간은 모교인 경운대 후배들을 위해 강단에 선다. 고등학교, 대학교 후배들 앞에 서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의무로 여긴다.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를 들으면서 멘토 없이 달려온 어려움을 후배들은 겪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 물론 후배들이 호텔리어로 자긍심을 가질 때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저는 항상 강단에 서면 후배들에게 당부합니다. 항상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그래야 기회가 왔을 때 움켜잡을 수 있다고. 여러분, 지금 기회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움켜잡도록 손을 내미세요."

기회를 잡기 위한 그녀의 도전은 앞으로 쭈~욱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글·사진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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