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선생이 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는 언제 펼쳐 봐도 마음이 뿌듯해지는 책이다. 다산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면서 해설을 덧붙이고 있어 이해하기 쉽고, 다산의 삶과 사상을 잘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저자 박석무는 유신반대운동으로 감옥에 있을 때부터 다산 저술 연구를 시작해 다산사상을 연구하고 알리는 일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분이다.
다산이 유배를 떠나게 된 이유는 천주학을 믿었다는 혐의 때문이다. 물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산을 아끼던 개혁군주 정조의 죽음과 함께 다산을 미워하던 세력에 의해 유배를 떠나게 됐다. 다산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며 만든 신도시 수원 화성 건설 당시 중요한 직책을 맡아 많은 일을 했다. 수원성 축조에 큰 역할을 한 거중기를 발명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다산은 한창 활동할 생애의 대부분을 유배생활로 보냈는데, 처음 유배를 떠난 곳은 경상도 장기라는 곳이었고, 그후 강진으로 2차 유배를 갔다. 강진에서 1년간은 죄인이라고 모두 두려워하며 가까이하지 않으려 해 머물 곳도 없었는데, 한 주막집 노인이 뒷방을 내주어 그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다산의 외가는 고산 윤선도 선생의 집안인 전남 해남의 윤씨댁이었는데, 외가에서 초당을 마련해주고 인근 고을의 자식들을 공부시키러 보내면서 다산이 초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벼슬길이 순조롭지 못했고 긴 유배생활의 고난을 겪지만 좌절하지 않고 다산학이라는 웅장한 학문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정약용의 '흠흠신서'와 '목민심서'는 관리들의 필독서였다. 박석무 선생은 다산학이야말로 근세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로서 의의를 갖는다고 본다. 동양의 중세나 조선의 중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주자학을 통해야 하듯이, 근세에서 현재로 이행하는 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다산학이라는 징검다리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다산학이 상당히 깊이있게 연구되고 있다고 한다. 다산학에 대한 8개 분야의 논문을 읽어보면, 그가 이룩한 학문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진보적이며 실용적인 학문이었던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다산의 사상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제대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의 생각이나 사상을 현실에서 직접 실천으로 옮기는 일이 우리의 과제라고 말한다. 다산이 그렇게 강조하고 주장했듯이, 행위와 실천이 없는 이론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진 일을 행동으로 옮겨야 인을 행함이 되어 결과나 효과가 나온다는 그의 주장이 바로 실학이다. 인이 생물의 이치이며 사랑의 이치라고만 믿고 있다가 나라가 통째로 썩어가고 온통 망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던 슬픈 역사가 영원히 사라지기 위해서라도, 다산학을 실천으로 옮기는 세상이 오기를 소망한다.
다산의 삶은 한 시대의 탁월한 지식인이 뜻을 펴지 못하고 좌절하는 모습, 그러나 시련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학문을 이루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다. 한편 정약용 형제와 가까운 친지들의 사상과 삶은 당대 지식인들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무엇을 지향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서양에 대한 관심이 천주학에 대한 관심과 신앙으로 나아간 정약종, 다산과 함께 유배를 떠나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중 생을 마감한 정약전, 황사영 백서로 알려진 천주교 탄압을 서양에 알리려는 시도를 하다가 사형을 당한 황사영도 정약용의 매부였다. 한편 다산은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시에는 당대 민중들의 삶에 대한 연민과 부패한 위정자에 대한 분노가 담겨있어 오늘날에도 감동을 준다.
신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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