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도심 재창조, 길에서 길을 묻다…전문가 노상대담

"근대적 원형 낡은 건물·좁은 골목, 대구는 대단한 역사적 자원 가진

경북대 건축과 이정호 교수
경북대 건축과 이정호 교수
문화체육관광부 컨설턴트 오민근 박사
문화체육관광부 컨설턴트 오민근 박사
포럼 참가자들이 향촌동 골목길에서 어깨를 맞대고 이정호 교수에게 주위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포럼 참가자들이 향촌동 골목길에서 어깨를 맞대고 이정호 교수에게 주위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21세기 들어 세계 도시들이 도심 재생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부수고 뜯어낸 자리에 새로운 건축물을 올리는 데만 열중하던 도시들은 대단위 개발만으로는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여 도심의 쇠락을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새롭게 주목한 것은 도심의 원형이었다. 오래된 건축물과 좁은 길, 빛바랜 벽과 낡은 유리창이 오히려 도시의 정체성을 돋보이게 만들고 외지인들에게 자기 도시만의 특성을 알릴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이라는 판단에서였다.

2008년 하반기부터 지난 2월까지 1년 반 넘게 대구 도심을 취재, 기획시리즈를 연재한 기자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전문가들도 이 점을 강조했다. "대구를 세계와 겨룰 수 있는 도시로 만들기 위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무엇인가?" "도시 전체의 역량을 집중시켜 대구만의 특성으로 키울 만큼 경쟁력 있는 부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근대화 전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도심 골목을 맨 먼저 꼽았다. 인위적인 도시계획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골목 주위로 근·현대 건축물들이 지붕을 맞댄 채 보존된 도시는 세계인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는 얘기였다.

대구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도 이 점에 주목하고 올해 세 번째 도심재생문화포럼을 1일 오후 향촌동과 북성로 일대를 걸으며 길 위에서 참가자들이 의견을 나누는 '노상대담'(路上對談) 형태로 진행했다. 한 시간 반을 걸으며 계속된 포럼을 동행하며 취재한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봄비가 3월을 넘어 4월까지 계속되며 도심의 회색빛을 더욱 짙게 만들던 1일 오후 3시 대구 중구 경상감영공원. 포럼의 출발지인 선화당 앞에는 70여명이 모여 있었다. 권원순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 대표를 비롯해 대담을 나눌 이정호 경북대 건축학과 교수(대담 상대인 문화관광부 컨설턴트 오민근 박사는 북성로에서 합류했다), 각계 전문가들과 중구 주민 등이었다. 오후 일정 도중에 틈을 내 윤순영 중구청장도 모습을 보였다. 윤 청장은 "날씨가 궂은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실 줄은 몰랐다"며 "대구 도심을 살리는 일에 각계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골목의 미학과 가치

경상감영공원을 한 바퀴 돈 뒤 곧바로 향촌동으로 향했다. 이정호 교수는 "향촌동 골목은 종래의 골목과 집들 주위로 일제강점기 때 근대건축물들이 들어서며 대구만의 풍경을 만들었다"며 "골목의 폭과 주위 건축물의 조화를 유심히 살펴보라"고 조언했다. 향촌동에서 태평로 쪽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골목들은 각각의 폭이 다르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길과 두 사람이 어깨를 닿아야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이 만나고 헤어지기를 되풀이한다. 어쩌다 있는 여유 공간은 어김없이 거주자들이 내놓은 화분들이 차지한다. 어두운 회색 골목에 조금이라도 자연미를 만들려는 골목 사람들만의 미학이다.

대우빌딩 바로 건너편 북성로 입구. 양쪽으로 골목이 그물을 친 넓은 신작로의 출발점에서 이 교수는 북성로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이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조선 후기 경상도의 중심이었던 읍성이 있던 자리입니다. 일본인들의 이해를 위해 읍성을 허물고 길을 낸 것입니다. 대구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시민들이 반드시 알고 의미를 되새겨 언젠가는 복원해야 할 역사적 공간입니다."

다소 늦게 합류한 오민근 박사는 "도심 재생의 여러 자원 가운데 골격이 되는 건 도로와 건축물"이라며 "도로와 건축물의 근대적인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대구는 그런 측면에서 대단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자세히 보면 건물마다 다양한 사연을 담고 있는 걸 알 수 있다"며 "건축물 자체의 구조뿐만 아니라 외부 마감, 이웃 건물과의 조화 등에서 20세기 초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건물이 헐린 공지에서 이웃 건물에 남은 철거 이전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점도 북성로가 주는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북성로의 가능성

북성로 중간 경북자동차매매사업조합 앞에 행렬이 멈췄다. 조합 건물은 대구 최초의 목욕탕인 조일탕 건물이다. 오 박사는 "이곳은 도시계획에 의해 뚫린 큰길과 골목이 만나는 부분인데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이런 지역에서는 항상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며 "대구읍성의 공북문이 있던 자리인 만큼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북성로 공구거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한강 이남의 상권을 좌우했던 만큼 단순히 낡은 상가 거리로 치부할 곳이 아니다. "북성로 기술만으로도 탱크 정도는 만들 수 있다"는 상인들 스스로의 말대로 수십년을 쌓아온 기술과 장인 정신이 녹아 있는 거리다. 북성로의 유래와 기술에 대해 설명을 들은 오 박사는 갑자기 "북성로 장인들이 힘을 모아 로보트 태권V를 만들어 세우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냈다.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강철 캐릭터인 로보트 태권V를 북성로 기술로 만들어내는 자체로도 충분히 명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 박사는 특히 어린이들에게 대구의 자부심을 키워주기에 좋은 소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도 "북성로에는 장소, 건물, 가게 하나하나와 관계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널려 있다"며 "보존과 개발을 적절히 조화시키면 전국적인 명성을 가질 정도의 명소가 될 여지가 무한하다"고 했다.

북성로 한 주민이 일행들에게 주장을 폈다. "막연히 거리를 지금의 모습대로 보존하자는 건 주민들에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고려청자는 수십년 갖고 있으면 값이 오르지만 거리는 갖고 있는다고 값이 올라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도심재생문화포럼이 형식적인 일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정호 교수는 "동성로 공공디자인 개선사업을 하면서 주민들의 요구를 많이 들었는데 북성로에서는 더 잘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라며 "주민들 스스로도 도심 재생사업의 주인공은 주민이라는 생각으로 사업과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문화창조발전소와 연계축 모색해야

한 시간 넘는 노상대담의 최종 도착지는 대구문화창조발전소가 들어설 KT&G 별관이었다. 오 박사는 "북성로의 역사와 기술을 문화창조발전소의 창조 역량과 연결시키면 훌륭한 도심 문화축이 될 것 같다"며 "주민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일대에 들어설 문화창조발전소와 창작교류센터 건설에 북성로 장인들을 참가시키는 방안을 연구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박사는 "우선 보존과 개발을 축으로 하는 도심 재생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반드시 옛것을 고집할 필요도 없고 개발을 반대할 이유도 없다는 점을 납득시키기 위해 중간중간 거점지역에 모범이 될 만한 사례들을 만들어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의 도심 정책은 획일적이고 행정기관 일방적이어서 다양성이 부족했다"며 "다양성의 시대에 가장 다양성을 담고 있는 곳이 골목인 만큼 물리적인 다양성과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콘텐츠들을 조화시켜내는 일이 향촌동, 북성로 재생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포럼에 동행한 전재규 대신대 총장은 "수창초등학교를 다니며 도심을 누볐고 동산의료원에서 평생을 일했지만 오늘 와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참으로 새롭고 대구 도심의 가능성을 본 것 같아 기쁘다"며 "앞으로의 세계는 문화가 중심이 되는 추세이니 대구의 문화유산을 살리는 것이 대구를 살리는 길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했다.

문화유산해설사로 활동하는 조영수씨는 "평소 관광객들에게 설명해주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들이 대구 도심에 숨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앞으로 다양한 콘텐츠들이 발굴돼 대구를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북성로와 서성로 일대를 하루빨리 되살려 2.7㎞에 이르는 대구읍성 순회길을 만들면 어디에도 없는 멋진 관광코스가 될 수 있다"며 "대구시와 중구청이 북성로와 향촌동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만큼 조만간 가시적인 사업이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이날 '노상대담'은 참가자들에게 결코 편하지 않은 행사였지만 끝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오 박사가 한마디 건넸다. "비가 오는데도 끝까지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동참하는 걸 보니 주민 참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구청에서도 재단과 함께 이런 행사를 힘있게 추진하는 걸 보니 대구 도심이 세계인들에게 알려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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