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수의 야구 토크] 벤치 클리어링

지난달 30일 대전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 이날 승부는 일찌감치 결정났다. 삼성이 7회까지 10대4 큰 점수 차로 앞서면서 승부가 그대로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8회 재미있는 장면(?)이 펼쳐졌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 상황이 감돈 것. 관중석에 앉아 있던 야구팬이나 TV로 중계를 본 시청자들은 눈치를 챘을까. 선수생활과 해설을 오랫동안 한 필자의 눈에는 한바탕 큰 폭풍이 불어 닥칠 것 같아 보였다.

삼성의 8회 공격. 9번 타자 조동찬이 유격수 앞 내야안타로 출루한 후 1번 이영욱 타석 때 2루 베이스를 훔쳤다.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플레이이지만 한화의 1루수 전현태가 당시 베이스에서 멀찍이 떨어져 주자 견제를 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됐다. 한화는 점수 차가 큰 만큼 예의상 삼성이 도루를 하지 않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삼성이 도루를 하자 약이 오른 한화 투수 박정진은 공을 몸 쪽으로 붙여 이영욱을 맞혔다. 경기 후 이영욱은 공이 몸 쪽을 향할 것으로 짐작했다고 털어놓았다. 삼성은 곧바로 반응했다. 타석에 들어선 2번 강명구가 번트를 댄 것. 다행히(?) 번트는 실패했고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폭발물의 도화선에 불이 붙지 않았다. 만약 강명구의 번트가 성공했다면 그라운드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필자가 생각건대 삼성의 다음 타자는 또다시 볼에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격앙된 선수들이 마운드로 달려 나왔을 것이다. 벤치 클리어링(Bench-clearing brawl)이 9부 능선까지 갔다 하산을 한 셈이다.

야구에서 벤치 클리어링은 상대선수의 빈볼이나 판정시비, 상호비방, 고의적인 자극과 시비가 발생하였을 때 선수들이 벤치를 비운 것을 빗댄 용어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상대 팀과 몸싸움이 벌어졌을 때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으면 동료애가 부족하다고 생각, 구단 차원에서 벌금을 징수하기도 한다. 벤치 클리어링을 팀의 사기, 자존심과 연관 짓기 때문이다. 태권도 발차기로 팀에서 박수를 받은 박찬호가 그 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최근 선수 간 집단 몸싸움이 종종 빚어지고 있다. 필자는 몇 가지 상황이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첫째가 외국인 선수와 한국 선수 간 문화적 차이 때문. 용병 타자들은 위협구가 들어오면 민감함 반응을 보이거나 상대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 행동으로 표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의사소통 부재와 서로 다른 문화에서 비롯된 오해가 그 원인을 제공한 셈.

두 번째는 한국 선수 간 서열화에 따른 수직적 구조다. 나이와 출신학교 등에 의한 고정관념이 상대의 감정을 자극하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또 고의적이냐 실투냐, 경기의 주도권 및 분위기를 변화시키려는 의도된 조작에서 빚어지는 경우다.

빈볼의 판정은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가장 잘 안다. 투수의 눈을 보면 다음에 일어날 일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분을 참느냐, 마운드로 달려가느냐,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가 벤치 클리어링의 발생 유무도 결정짓는다.

국내 프로 무대에서는 선수 대부분이 학교 선후배, 친구 사이라 벤치에서 지시가 떨어져도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기억 한 가닥이 떠오른다. 현재 이만수 SK 수석코치의 선수 때 이야기다. 당시 쌍방울 투수 박진석 선수가 이만수 선수에게 빈볼을 던졌고 이만수 선수는 바로 마운드에 달려갔다. 보통은 투수 역시 달려오는 타자를 향해 달려가지만 박진석 선수는 외야 쪽으로 도망을 쳤다. 이에 이만수 선수는 끝까지 쫓아가는 장면을 연출했다. 워낙 나이 차가 많아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어쨌든 벤치 클리어링은 승패를 떠나 지켜보는 팬들에게, 특히 어린이 팬들에게는 교육적으로 긍정적이지는 못하다. 폭력행위는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동업자 정신, 동료애를 바탕에 둔다면 치열한 승부에서 빚어지는 벤치 클리어링은 야구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가 된다.

큰 점수 차로 지고 있던 팀이 분기탱천해 악착같은 승부욕을 그라운드에 쏟아부으면 경기는 더욱 박진감을 갖게 되고, 포기한 경기를 뒤집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동수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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