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차림의 한 여자가 서 있다. 점점 그 여자의 얼굴과 옷, 표정이 희미해져가다가 결국에는 실루엣만이 남는다. 아트스페이스 펄에서 6월 12일까지 열리고 있는 김건예의 전시는 '그리드(Grid), 다층적 의미의 관계망'을 주제로 한 작품 20여점을 선보인다.
13년간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작가 김건예는 끊임없이 '정체성'을 고민했고 이는 그의 작품의 화두가 됐다. "독일에서 아무리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사회의 일원이 됐다고 생각해도 결국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제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죠." 작품은 작가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서 현대인 모두를 은유하고 있다. 저마다 당당하고 개성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사회 시스템 속에서 개인의 선명한 모습은 지워지고 흐릿한 존재감만이 남는다.
작가는 사람 형상 위에 페인팅 붓으로 엷은 그물망을 그려넣는다. 열번 가까이 그물망을 그려넣으면 사람은 표정조차 희미해진다. 그물망에 갇힌 듯한 현대인의 익명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배경 또한 눈여겨봐야 한다. 촘촘하고 반복적인 패턴은 도시의 꽉 짜여진 틀과 시스템을 은유하고 있다. 어쩌면 그 시스템 속 그물망에 갇힌 현대인의 자화상일지 모르겠다. 김옥렬 아트스페이스 펄 디렉터는 "아파트의 구조나 거리의 보도블록, 도서관, 사무실 등 도시의 유형적인 특징인 '그리드'를 통해 익명으로 존재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드' 작업으로 작가는 독일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한편 전시가 열리고 있는 현대미술연구소'아트스페이스 펄은 지난해 9월 김옥렬 디렉터가 '가장 적극적인 비평은 기획'이라는 취지에서 문을 연 곳으로, 지역에서 큐레이터가 운영하는 유일한 전시 공간이다. 신진 작가 육성 프로젝트, 창작스튜디오 작가 네트워크, 큐레이팅 실습 등 작가들을 육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 및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김 디렉터는 "대안공간과 상업화랑의 중간지대에서 젊은 작가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소개해나갈 것"이라며 "작가와 꾸준한 워크숍을 통해 진화해가는 작가의 모습을 끌어내는 큐레이터와 전시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053)651-6958.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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