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명태

화가 백태호는 1923년 생으로 1988년 세상을 떠났다.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유증이었다. 1974년 생 박성근이 백태호를 처음 만난 것은 선생이 작고하기 1년 전인 1987년이었다. 당시 백태호는 대구 능인중학교 미술 교사였고, 박성근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백태호는 9년 전 쓰러져 1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일어났지만 후유증으로 걸음걸이가 온전치 못했고, 손까지 떨었다. 그는 마비된 손을 풀기 위해서 병상에서 수천 장의 크로키를 했다. 학교로 돌아온 뒤에도 크로키에 열중했다. 크로키는 마비된 자신의 몸을 푸는 행위이자, 아직 그림을 모르는 아이들에게는'기본기'였다.

미술 선생 백태호는 1987년 2학기 수업을 마치고, 겨울방학 때 세상을 떠났다. (1988년 초) 그러니까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박성근과 떨리는 손으로 크로키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미술 선생 백태호가 공유한 시간은 1년이 채 안 된다.

백태호는 망자의 길을 갔고, 박성근은 또 제 갈 길을 갔다. 죽은 백태호는 잊혔고, 미술에 재능도 취미도 없었던 박성근은 공학도가 됐고, 졸업 뒤에는 플라스틱 원료회사에 취직했다.

십수년 전 박성근은 미술을 전공한 친구의 집에서 백태호 선생의 그림 '명태'를 보게 됐다. 미술에 문외한이었지만 박성근에게 선생의 그림은 충격이었다. 자신의 중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사람,'그림의 기초는 크로키'라며 끊임없이 세모와 네모, 동그라미를 그리게 했던 사람의 그림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중학교 시절 수업시간에는 세모와 네모, 동그라미를 보았을 뿐 선생이 필생을 걸고 그린 그림을 볼 기회는 없었다.

얼마 뒤 박성근은 유럽 여행 중에 유명한 미술관에서 서양화가의 그림들을 보면서 스승 백태호의 '명태'를 생각했다. 유명한 미술관에 걸린 이름난 화가의 그림들이었지만 백태호 선생의'명태'만큼 전율은 없었다.

박성근은 그날 스스로'명태지기'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올해로 7년째 작은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선생의 작품을 지키고 있다. 화가 백태호 선생이 작고하고 22년이 지난 2010년, 그의 유고전이 다시 열린 배경에는 '명태지기 박성근'과 같은 후인이 있었다.

화가 백태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명태'가 최고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날아오르는 명태''솟구치는 명태''소리치는 명태''절규하는 명태'를 그렸다.

대양을 헤엄치는 등푸른 물고기도 아니고, 말라비틀어진 명태가 날아오르고, 솟구쳐 오르고, 소리치고, 절규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러나 고혈압으로 쓰러졌다가 일어난 백태호는 들었다. 백태호는 철사 옷걸이에 대롱대롱 매달린 마른 명태들의 절규를 들었고, 비상(飛翔)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들은 소리를, 자신이 본 명태의 비상을 떨리는 손으로 캔버스에 옮겼다. 그리고 뒷날 귀밝은 후인이 백태호의 눈과 귀에만 보이고 들렸던 그 명태의 절규를 다시 듣고 보았다.

예술은 그렇게 탄생한다.

작가는'이런 게 예술이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자신의 귀에만 들리는 절규를,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몸부림을 담아내면 그뿐이다. 진실로 절규를 담아내기만 하면 후세 사람은 그 소리를 듣는다. 짧은 세월 만났고 헤어졌던 선자 백태호와 후자 박성근은 예술이 탄생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말라비틀어진 명태, 죽은 줄 알았던 명태가 절규하며 비상한다. 죽어 누워있던 백태호가 비상한다. 대구 수성아트피아에서는 '철우 백태호 특별회고전'이 23일까지 열리고 있다.

조두진 문화부 차장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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