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는 제2의 국화(國花)로 부를 만하다. 연분홍 색조와 연두빛 화관(花冠)은 화려한 듯 슬픈 듯 우리 민족의 정서를 잘 표현해 준다. 관상뿐만 아니라 실용에서도 쓰임이 두터웠다. 춘궁기 땐 구황(救荒)작물로, 풍족할 땐 화전(花煎)놀이 같은 낭만으로, 술꾼들에게는 향기로운 두견주로 민초들과 애환을 같이 했다. 뒤이어 피는 철쭉은 진달래와의 비교에 밀려 비슷한 자태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았다. 시인 묵객들의 작품소재에서도 순위가 밀렸다. 꽃에 독을 품은 천형(天刑) 때문이었다. 진달래가 '참꽃' 애칭을 받고 의기양양할 때 '개꽃' 철쭉은 뒤꼍에서 훌쩍였다. '산 밑'에서의 홀대와 무관하게 5월의 산은 철쭉 세상이다. 싱그러운 분홍빛 꽃자수는 전국 산등성이를 수놓고 있다. 철쭉은 이제 군락지 수나 규모면에서도 진달래를 제치고 봄 산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호수에 떠 있는 매화 같다 하여 '수중매'
황매산은 합천군 대병'가회면과 산청군 차황면의 경계에 자리 잡은 산. 소백산맥의 후광이 두터우며 북쪽 비탈면에서는 황강의 지류가 발원한다. 합천호의 수면에 비친 모습이 마치 호수에 떠 있는 매화 같다고 해서 '수중매'(水中梅)라고도 불린다. 매년 5월에 열리는 철쭉제로 유명하지만 여름에는 계류(溪流)산행, 가을에는 억새산행, 겨울엔 눈꽃산행 등 계절별 테마산행을 즐길 수 있는 명소다. 황매평전의 철쭉과 함께 황매산 산행의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는 모산재는 큰 바위군락으로 이루어진 악산(嶽山)이다. '영남의 소금강'이라는 별명처럼 거대한 암릉을 따라 순결바위, 돛대바위, 국사당 등 명소가 줄을 잇고 있다.
올해 철쭉의 개화는 예년에 비해 열흘 정도 늦은 것으로 보인다. 장흥의 제암'일림산, 보성의 초암산, 남원의 봉화산 등도 이상기온 탓에 꽃축제를 일주일 이상 미루었다.
등산로는 황매산 철쭉과 모산재 비경을 두루 감상할 수 있는 누룩덤-감암산-베틀봉-황매산-모산재 코스로 잡았다. 산청, 합천 쪽 모두 황매평전까지 임도가 개설돼 관광객들은 자동차에서 내리자마자 철쭉밭으로 뛰어들 수 있다. 하긴 고지의 꽃밭이 등산객들에게만 독점돼서도 안 된다. 지팡이를 든 노인, 하이힐을 신은 아가씨, 걸음마를 뗀 아이에게도 꽃은 공유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꾼들은 그런 '무임승차'의 유혹에 초연하다. 고진화래(苦盡花來). 산꾼들에게 꽃은 땀과 거친 호흡의 결과일 뿐이다. 생수를 챙기고 등산화 끈을 바짝 조인 등산객들은 중촌리 마을 뒷길을 힘차게 오른다.
#60만㎡ 황매평전 가득 메운 꽃물결
누룩덤-감암산에서 천황재로 오르는 길은 전형적인 육산(陸山)이다. 지루한 오르막길을 걷다가 호흡이 가빠질 때쯤이면 매바위나 칠성바위가 튀어나와 일행의 땀을 식혀준다. 신록이 막 제 빛깔을 내는 합천 들녘도 청량제로 그만이다.
천황재에서 조금씩 비치기 시작하던 철쭉 군락은 베틀봉 부근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꽃물결을 이루었다. 꽃길 따라 세상은 연분홍 천하다. 분홍 카펫, 철쭉 융단, 꽃물결…. 비경 앞에서 언어는 언제나 유한(有限)하다. 하긴 이 상황에서 어떤 수사도 무용(無用). 비탈을 가득 메운 철쭉은 저희들끼리 몸을 비벼가며 분홍빛 웃음을 토해낸다. 웃음소리 따라 꽃향기도 봄 하늘로 맑게 울려퍼진다.
꽃 앞에서 사람들은 눈보다 카메라 렌즈로 먼저 꽃을 보고, 코보다 휴대폰이 먼저 향기를 맞는다. 관광객들은 그저 디카에 휴대폰에 풍경들을 우겨넣기에 바쁘다. 요즘 사람들은 경치나 꽃을 보면 휴대폰, 카메라부터 들이댄다. 이제 관조나 완상(玩賞) 같은 여유로운 감상법보다 기계에 저장했다가 꺼내 보는 '리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누군들 이 순간을 놓치고 싶을까. 가는 봄을 멈춰 세우려는 듯 꽃무더기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추억 만들기가 한창이다. 그들에게 올봄의 황매평전은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황매평전에는 생태의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 본래 이곳은 70년대 목초지로 개발된 곳. 당시 방목한 젖소와 양들의 식성이 너무 좋아 주변 식물들을 다 먹어치웠다. 그 중 독성이 강한 철쭉만 살아남아 넓은 초지에 군락을 형성해갈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외면받고 진달래에게 상석(上席)을 내주었던 핸디캡이 이제는 산상화원을 이룬 배경이 된 것이다.
#모산재 암릉 따라 순결바위·돛대바위
베틀봉에서 느린 걸음으로 1시간쯤 동쪽으로 이동하면 모산재에 이른다. 부정한 사람이 바위틈에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순결바위,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러 은하수로 가던 중 배가 걸렸다는 돛대바위,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는 국사당이 하산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풍수가들에게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 무지개터는 사면이 시야가 트여 가장 멋진 조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핑크빛 산행에 들떠 있던 산꾼들은 이곳 암릉에 와서야 비로소 평정을 되찾는다. 합천댐의 푸른 물빛도 오후 햇살에 은빛 물결로 일렁인다.
봄철 황매산은 등산과 꽃구경의 감동과 암릉 산행의 조망을 두루 경험하기에 좋은 코스다. 철쭉이 연분홍 꽃바람을 이루는 이번 주말이 황매산 등반의 절정이 될 것 같다. 주말이나 피크타임 때는 평소보다 2, 3시간 일찍 출발하는 것이 좋다. 교통 혼잡도 피할 수 있고 사진 찍을 때 일조(日照)와 조도도 적당하기 때문이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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