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석명'하세요. 무슨 '설명'을?

40대이신 판사님이 자신은 '진상'이 '진국'과 비슷한 말인 줄 알았다고 해서 그 자리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분들도 많으리라. 한창 자기 일 하기에도 바쁜 40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방송과 인터넷상의 온갖 신조어와 약어들을 따라 간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그야말로 화성인(?)에 가깝다고 해야 좋을 것이다.

나홀로 소송을 힘들게 하신 분의 법정 경험담이 생각났다. 판사님이 '석명'하세요 라고 하시는데 네? 네?를 연신 반복하다 당혹감에 아무 말도 못하고 법정을 나왔다 했다. 처음엔 '설명'이라는 줄 알았는데 다시 들어보니 '석명'이고, '석명'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설명'과 비슷한 말인지 그렇다면 나에게 무엇을 설명하라는 것인지 그렇게 머릿속에서만 웅웅거리던 물음들 때문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역지사지가 될 법한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진상'을 '진국'으로 알았다는 건 좌중을 한바탕 웃게 한 농담에 지나지 않으나 '석명(釋明)'을 '설명(說明)'으로 알았단 건 자신의 전 재산을 두고 벌어질 수도 있는 소송의 승패와 연관되기에 웃음조차 얼어붙는 절박함일 뿐인 것이다.

법전의 한글화 작업이 완료되면 한자를 모르고선 읽을 수조차 없다든가 일본식 한자 표현이라 이해가 안 되는 경우는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말이지만 내게는 우리말 아닌 부분이 남는다. 남을 수밖에 없다. 전문 분야, 전문 용어란 게 그런 거니까. 그래서 어쩌면 더 위험할 수 있다.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게 적어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므로. '선의', '악의'는 아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법전에서는 '모르는 것'과 '아는 것'으로 그 쓰임새가 다르다.

이쯤에서 되묻게 된다. 법전, 판결문, 진단서를 어째서 다 알아야만 하는가? 주식 용어도 IT관련 용어도 우리말 아닌 것은 매한가지인데 아무도 이를 크게 불평하지 않는다. 복잡다기한 각계 분야들을 모두 알 수도 알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관심 분야라면 찾아 공부하면 되는 것이어서 모르는 말로 대화하는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법서나 의학서를 공부하지 않았으면서 '왜?' 라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아픈 것도 소송도 관심 분야가 아닌 내게 들이닥쳐 치명적인 나의 불이익으로 남을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그럴 수는 없다. 문제는 생사 혹은 그에 견줄만한 일생일대의 내 일에 내가 배제되어 있다는 것, 내가 알기만 한다면 달라질 수 있을 터인데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불안과 불신.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자는 생쥐를 못 믿어도 크게 해될 게 없으나(물론 동화 속 사자는 사정이 다르지만) 생쥐가 사자를 잘못 믿었다가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문제인 것이다.

불신이란 게 원래 하루아침에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법조계 안팎에서 쏟아지는 불신타파용 개혁안들을 보다 보면 도대체 불신을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가 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불신의 해소는 그 불신을 이해하려는 한걸음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김계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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