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눈썹 위에서 아예 물줄기를 이룬다. 뚝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주르르 흘러내리는 판이다. 사람 몸에서 이렇게 많은 물이 흘러나올 수 있나 싶다. 반쯤 정신 나간 사람 소리를 듣더라도 마음이나 다잡아보자며 "거참 시원하다"고 외쳐본다. 동행한 사람들이 안쓰럽다는 듯 바라본다. 산바람도 골바람도 한낮 땡볕을 피해 숨었나보다. 비겁한 녀석들이다. 바람이 제 역할을 버리고 숨어버리다니. 가끔씩 팔을 뻗어 그늘막을 내려주는 나무들도 별 희한한 놈을 보겠다며 혀를 끌끌 차는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다. 뙤약볕에 산길을 걸으며 땀으로 범벅이 됐건만 갈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바람 때문에 겉부터 시원해지는 게 아니라 오장육부가 서늘해지듯이 속부터 냉기가 차오른다. 기분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러다가 결국 미치는 건 아닌지 턱도 아닌 걱정이 들 정도다. 묵은 찌꺼기를 버린 덕분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산마루를 바라보니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온다. "껄껄껄, 놀랄 것 없다. 내 이름이 명색이 냉산(冷山) 아니더냐? 비록 계곡물을 품지는 않아도 네 속을 개운하게 만들 터이다." 결국 환청까지 들리나.
폭염에 지친 심신, 삼림욕으로 회복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와 창림리를 아우르는 냉산 숲길은 길이가 무려 25.66㎞에 이른다. 산림청이 펴낸 '아름다운 임도 100선'에 구미시 옥성면 주아리 숲길과 함께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오늘 가는 길은 전체 숲길 중 도리사에서 일선리까지 9.7㎞ 구간.
대구에서 상주로 가는 25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구미 해평땅에 들어서 한참을 더 달리면 오른쪽으로 도리사로 빠져드는 길을 만날 수 있다. 포장도로를 따라 산을 오르면 도리사 아래편 식당가에 있는 주차장이 나온다. 오늘 걷는 냉산 숲길은 식당 아래 왼편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숲을 걷기 전에 도리사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다. 주차장에서 도리사까지도 제법 가파른 포장길이 이어진다.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계절이면 절 바로 아래까지 차를 이용해 올라갈 수 있다. 쉬엄쉬엄 울창한 솔숲에서 삼림욕을 즐기며 올라가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급할 것 없지 않은가. 도리사로 오르는 길이 너무 녹록해서도 당치 않은 일이다. 천 년 세월을 거슬러 가는 길 아닌가.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구미시가 펴낸 '구미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옛이야기'에는 이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많이 실려있다. 숲길을 걸으며 이야기나 들어보자. 위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19세에 돌아온 고구려 사람 아도(阿道)는 신라에 불법을 전하기 위해 몰래 숨어들어왔다. 현재 구미시 도개면에 있는 모례장자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자청한 그는 낮에는 부지런히 일하고, 밤에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포교활동에 열중했다. 3년 세월이 흐른 뒤 아도는 모례에게 떠날 것을 알리고, 절을 지을 테니 시주를 당부했다. 못내 아쉬워하는 모례에게 "집 대문에 칡넝쿨이 돋아날 때 그 넝쿨을 따라가면 나를 만날 것"이라고 했다.
아도화상 창건한 신라 첫 사찰 도리사
모례는 눈 덮인 겨울 어느 날 칡넝쿨을 발견하고 그 길로 따라나섰다. 냉산 중턱에 이르자 절이 서 있고, 아도는 눈 속에서 참선 중이었다. 한겨울 눈 속에 복숭아와 살구꽃이 만발했다고 해서 '도리사'(桃李寺)로 이름지었고, 신라 불교의 '길이 열린 곳'이라는 뜻에서 '도개'(道開)라는 지명이 생겼단다. 훗날 아도화상은 냉산 절벽 가운데 있는 금수굴로 들어간 뒤 사라졌다고 한다.
냉산 숲길은 도리사 아래쪽에서 일선리까지 북서쪽으로 큰 가닥을 잡아 일일이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많은 굽잇길을 돌아든다. 가파르지도 않은 숲길이어서 산악자전거를 타고 충분히 오갈 수 있다. 물줄기가 없어 아쉽기는 해도,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절벽이 없어 허전하기는 해도 숲길은 심심할 겨를이 없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거리가 멀다면 중간에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몇 군데 있기 때문에 무리할 필요도 없다. 한때 이곳 냉산의 깊은 솔숲에도 송이버섯이 꽤 많이 났다고 한다.
길 안내를 맡은 문화관광해설사 김교환 씨는 "이제는 옛날 이야기지만 어렸을 때 송이를 캐러 다니기도 했다"며 "그때만 해도 송이를 캐서 큰 벌이를 한다거나, 송이를 함부로 캐지 못하게 지키는 일도 없었다"고 했다. 덧붙여 이곳 길은 달밤에 걷기 좋다고 했다. "냉산 숲길을 걷기에는 봄, 가을이 가장 좋고 여름이면 보름달이 훤히 뜨는 밤에 걷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 된다"고 했다.
시야가 탁 트이는 고갯길에 올라보니 저 멀리 해평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평면은 내륙의 지명 중 바다 해(海)를 쓰는 드문 지역 중에 하나다. 낙동강을 끼고 도는 너른 평야에 어울리는 이름이리라. 강 건너편에 선산읍이 숨은 듯이 보이고, 그 뒤쪽으로 비봉산 자락이 기운차게 뻗어가고 있다. 당초 숲길을 따라 일선리로 내려설 계획이었지만 새로 난 임도를 보고 작정을 바꿨다.
보름달 보며 걸으면 또다른 낭만
냉산 서쪽 줄기로 내려서면 일선리이고, 길을 갈아타서 임도를 더 내달으면 북쪽으로 신림리에 닿는다. 새로 난 길은 생경스럽다. 앞서 임도가 10년 세월이 흘러 자연의 모습을 되찾은 데 비해 새 길은 아직 사람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길을 내려고 깎은 절개지는 흙더미가 생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자연은 경이롭다. 만든 지 1년 남짓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담쟁이가 가지를 뻗고 곳곳에 싸리나무가 터를 잡았다. 이렇게 몇 해가 더 지나고 나면 식생은 생채기를 덮고, 사람들은 즐거이 길을 걸을 터이다.
선산은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마무리한 곳이다. 팔공산 동오수에서 견훤에게 대패했지만 다시 군사를 모아 김훤술, 김선궁 등 맹장을 얻어 냉산에 숭신산성을 쌓고 견훤을 맞아 큰 싸움을 벌였다. 숲길에서 3㎞가량 오르면 냉산 꼭대기에 닿을 수 있다. 해발고도 692m에 불과하지만 인근에 높은 산이 없어서 선산 일대와 굽이치는 낙동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도리사에서 출발하면 보다 쉽게 정상에 닿는다. 돌아오는 길, 비록 폭염 속에 몸은 지쳤지만 넉넉한 삼림욕으로 마음은 한결 개운해졌다. 냉산 덕분이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구미시 문화예술담당관실 권삼문,
문화관광해설사 김교환 054)450-6063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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