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대회는 오지 레이스 전문 기획사 'Racing The Planet'에서 만든 대회다. 사막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거나 오지 레이스 골수 마니아들을 위한 이벤트 형식의 대회로 매년 대회 장소를 바꾸어 새로운 세계와의 소통을 목표로 한다. 베트남, 나미비아, 호주를 거쳐 내년에는 히말라야(네팔)에서 개최된다.
베트남에 가 보기 전까지 무식할 만큼 현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나에게 베트남이란 전쟁영화에서 본 정글과 삼각형의 대나무 모자를 쓴 사람들, 가끔 나오는 경제에 관련된 뉴스, 베트남 쌀국수, 전통의상인 옆단이 길게 파인 아오자이를 입은 예쁜 베트남 아가씨들 정도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베트남 레이스는 1년 중 가장 춥다는 2월 사파 지역에서 열렸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던 베트남에서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왠지 무조건 가야 한다는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렇게 계획에도 없이 참가한 대회다 보니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사파는 프랑스 통치 시대인 1920년대에 개발된 피서지로 주변 산간 소수민족을 만날 수 있는 트레킹 코스로 유명하다. 또한 베트남에서 제일 높다는 판씨판(fan si pan-해발 3,143m)이 있어 최근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내가 좋아하고 찾아다니는 대회들의 특징은 기본 장비를 자신이 휴대하고 식사를 스스로 해결하는 자급자족(서바이벌) 대회들이다. 이번 베트남 대회도 예외 없이 자급자족 대회로 열린다. 대회는 사파 지역 전역과 판씨판 주위를 헤집고 다니는 6일간의 서바이벌 형태로 열렸는데, 달릴 거리는 250㎞(하지만 폭우로 인한 코스 유실로 227㎞로 줄어듦). 원시림과 산길을 헤치며 달려야 하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대회 장소까지는 하노이에서 9시간 동안 야간열차를 타고 사파에 도착, 기차역이 있는 라오카이에서 미니버스로 5시간 정도를 더 가야 했다.
첫날 코스는 원래 120㎞였다. 하지만 폭우로 유실된 코스가 생겼기에 105㎞로 단축 됐다는 소식이 우리에겐 커다란 위안이다. 현지 민속 공연팀의 한마당 축제 후 5박 6일 지옥의 레이스가 시작됐다. 출발 전 주최측에서는 현재 이곳에 비가 많이 오는 관계로 모두 안전에 최대한 신경을 쓰라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급조한 다이어트로 가벼워진 몸과 적당한 무게의 배낭은 나를 선두권 15명 그룹에 속하게 만들며 무난한 레이스로 이끌었다. 하지만 15㎞ 지점을 몇 백m 안 남긴 자갈지역에서 돌 하나를 잘못 밟았다. 오른쪽 다리가 찌릿하더니 대퇴근에 순간적인 마비 증상이 생겼다. 이후 나의 레이스는 부상 후유증으로 악몽의 시간이 되었다.
첫 번째 체크포인트를 지나 강을 건넌 후 본격적인 언덕이 시작됐다. 지금부터 1천m 이상을 올라가야 한다. 배낭에 부착했던 스틱을 사용하며 조심조심 올라갔다. 라오카이에 도착하면서부터 비를 만났는데 이곳은 이전부터 비가 내렸던 것 같다. 위로 올라갈수록 길은 점점 진흙밭으로 바뀌고 있었다. 가뜩이나 미끄러운 바닥에 오른쪽 다리까지 힘이 빠지다 보니 자꾸 미끄러지고 넘어진다. 이제는 여러 번 꺾여 넘어진 무릎까지 시큰거린다. 다리는 아픈데 자욱한 안개까지 길을 막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안 보이는 길을 가려니 이건 완전 지옥으로 가는 기분이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오르막도 세 번째 체크포인트 근처부터 내리막으로 변하면서 길이 좋아졌다. 제법 규모 있는 마을에 체크포인트가 있었는데 비가 오는 날씨에도 현지 주민들이 잔뜩 구경을 나와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일본인 지카게 씨와 길을 가는데 어둠이 찾아오며 안개와 함께 다시금 비가 시작된다. 안개가 너무 심하니 랜턴을 켜도 앞이 잘 안 보인다. 코스는 좌측으로 바닥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대책 없이 높은 절벽이며 오른쪽은 언제 산사태가 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길이다.
네 번째 체크포인트부터는 엄청난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추위와 비 때문에 고어텍스 재킷을 꺼내 입고 가는데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발목도 삐었는지 많이 부었고 넓적다리 통증으로 인해 앉아서 스트레칭하기도 힘들 정도다. 추위 때문에 재킷 모자를 눌러 쓰고 버프로 얼굴을 가리고 가는데, 라오카이 인근 커다란 마을에서는 코스에 야광스틱이 안 보인다. 현지 아이들이 죄다 집어 갔기 때문이다.
어렵게 다섯 번째 체크포인트에 도착하니 온수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참가자 전용 텐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앞으로 21㎞만 더 가면 골인이라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계속 가기로 했다. 마지막 체크포인트를 지나 길을 가는데 동네 개들이 집단으로 덤벼든다. 난 개를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스틱으로 후려쳐 쫓아낸다.
멀리 언덕 위에 도착지점을 알리는 깃발이 보이기 시작한다. 비몽사몽 피곤함과 다리의 통증으로 힘들게 기다시피 언덕을 올라가 골인 지점에 도착했다. 말이 105㎞이지, 여기까지 오는 데 꼬박 23시간 25분이 걸렸다.
베트남 레이스의 마지막 날. 쏟아지는 아침 햇살과 주위의 푸르름이 뿜어내는 아찔한 산뜻함이 느껴진다. 모든 참가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최대한 멋있는 옷차림을 준비하여 사파 입성을 준비한다.
골인 지점으로 가는 나에게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 계속해서 "축멍~"(축하합니다)이라고 한다. 나도 합장하며 "깜언~"(감사합니다)이라고 화답한다. 서로의 얼굴에서 밝은 웃음이 교차한다. 그들의 환한 미소를 통해 힘들었지만 행복하며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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