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도남동 도남마을은 낙동강을 낀 마을 가운데 가장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도남마을을 끌고 왔던 강력한 힘이 도남서원이었다면, 20세기 도남마을 변화의 주요 고리는 교회였다. 21세기를 맞은 현재, 마을의 변화를 일으키는 핵심 고리는 바로 굴착기(낙동강사업)이다.
도남서원 제사와 낙강시제, 마을 산신제 등으로 묶였던 공동체는 교회(예배)라는 새로운 구심체를 매개로 변화의 물결을 탔다. 산신제를 통한 믿음의 방식은 교회를 통한 믿음의 방식에 의해 완전히 해체된 것이다.
그러나 도남의 오늘은 산신제나 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외부의 강력한 힘에 의해 탈바꿈하고 있다. 바로 굴착기로 상징되는 낙동강사업과 개발이다. 낙동강사업으로 마을의 주요 생계원인 사과 재배지가 대폭 줄었다. 대신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 생태공원 등이 들어서고 있다. 사과농사를 짓던 주민들은 어느 땅에 어떤 작물을 지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다. 동식물의 보고였던 낙동강 하중도(河中島), 오리섬은 말 그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오리섬의 나무는 베어졌고 오리와 새들은 떠났다.
◆사과로 출세한 마을
도남에는 60년대까지 쌀이나 보리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낙동강을 끼고 있지만 양수시설이 없어 물대기가 어려웠고, 홍수 때는 제방도 없어 모조리 쓸려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70년대 들어 양수시설을 갖추고 통일벼까지 보급되면서 벼농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남마을을 한 단계 발전시킨 요인은 무엇보다 사과농사였다. 70년대 초반 일본에서 접목한 후지사과(부사) 묘목을 마을에 들여오면서 변화의 조짐이 일었다. 일손은 많이 들지만, 단위 면적당 수익률이 높아 너도나도 사과농사에 뛰어든 것이다. 보리나 다른 밭농사를 하던 사람들도 사과 수익이 '짭짤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재배 농산물을 대부분 사과로 바꾸게 됐다. 70년대 초반까지 천수답으로 기근에 시달렸던 마을은 80년에는 '부자마을'로 선정되기에 이른다.
마을에 처음 후지사과를 심었다는 김옥봉(70)씨는 "선착순으로 묘목을 받아 후지사과 나무를 심게 됐는데, 심을 때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는기라. 38년 전쯤이었는데, 고 때 시세가 좋았어. 땅 한 평에 2천200원할 때 후지사과 한 짝(상자)에 만3천원 갔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마을들이 뺑 돌아가면서 전부 사과밭이었어. 그때 80년도에 부자마을 선정 되가지고 집집마다 요소(비료) 두포씩 다 받았어. 사과로 출세한 마을이라"라고 했다.
사과로 출세한 마을은 이제 낙동강 사업에 따라 생업을 바꾸거나 일손을 놓아야 할 판이다. 제방 축조와 보 건설,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 건립 등에 따라 사과밭을 비롯한 논과 밭 상당부분이 사업부지에 포함된 것이다.
귀향해 마을 동장을 맡고 있는 김수동(53)씨는 "사과는 보공사로 2/3가 날아가, 옛날에 대면 1/3도 안 남았다"고 했다.
◆거센 변화의 바람
도남마을은 가장 큰 소득원인 사과밭 절반 이상이 사업부지로 편입된 것을 비롯해 낙동강 사업을 통해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오리섬에 대규모 준설을 벌이고, 하류에는 상주보를 건설 중이다. 상주보 인근 산과 사과밭, 논과 하천부지 등 12만850여㎡ 터는 2013년 개관을 목표로 국립 낙동강생물자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도남마을 상주보 건너편 중동면 오상리 대비마을에도 67억원을 투입해 생태하천 조성사업을 벌이고 있고, 강 건너 비봉산 기슭에는 낙동강생태문화탐방로도 꾸미고 있다. 여기에다 마을 북쪽 경천교 인근에 조성 중인 상주자전거박물관까지 포함해 도남마을은 그야말로 대변신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다.
마을의 거센 변화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일부는 개발에 대한 기대, 고된 농사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는가 하면 일부는 평생의 터전이 사라진다는데 대한 진한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4대강 사업 때문에 사과밭 다 드갔어. 이제 칠십이 께 고나마도 대통령이 늙은 할마이들 편하게 살라고 그라는지. 사람 팔자라는 건 이리 뒤집어졌다 저리 뒤벼졌다 그래. 이렇게 좋은 세상을 볼지 누가 알았어. 진짜 앞으로 멋지게 살 거야."
김옥봉씨는 고된 사과밭 일에서 해방되고 보상금까지 받아 편하게 살 계획이라고 했다.
김수동씨도 "여기는 (자전거)박물관도 들어오고, 생물자원관도 조감도대로만 되면 기가 막힌기라. 오이하우스 인근도 2차로로 포장한다고 들었다"며 "촌에서도 자꾸 좋아져야지 나빠지면 누가 촌에 살라고 하겠어. 앞으로 가면 더 안 좋아지겠느냐"고 기대했다.
김만심(75)씨는 "밭에 사과나무하고, 깨랑 콩도 같이 하는데 강 사업에 다 들어갔어. 뒤에 감나무까지. 나보다 더 많이 집도 들어가고 논도 들어가고 밭도 들어간 사람도 많아"라고 아쉬워했다.
최근 마을 노인들은 새 걱정거리가 생겼다. '평생 농사일로 일군 사과밭과 바꾼 보상금을 어떻게 자식들에게 나눠줘야 죽은 뒤에 싸움이 나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마을에 분 변화의 바람은 이렇게 주민들에게 개발에 대한 기대와 아쉬움, 걱정거리를 남겼다.
◆오리섬과 강 추억
낙동강사업을 통해 도남마을 주민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과재배지 감소'이지만, 강마을 생태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오리섬 개발'이다.
도남서원과 건너편 비봉산 청룡사 사이 낙동강 일대 20만㎡ 가량 길게 펼쳐진 오리섬. 지난해까지 미루나무, 버드나무, 물푸레나무를 비롯해 숲이 울창했고, 오리·왜가리 등 각종 동식물의 보고였다. 그러나 올해부터 생태공원(생태학습체험관 등)을 만들기 위해 대규모 준설을 벌이면서 여러 대의 굴착기를 동원해 섬 주변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모래를 덮었다. 물살이 약해져 쌓인 모래톱이 섬을 만들었으나, 결국 인공의 힘으로 섬을 변모시키고 있는 것. 이로써 낙동강 오리섬에서 더 이상 낙동강 오리알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마을 사람들은 오리섬을 사이에 두고 동쪽을 '원강', 서쪽을 '샛강'으로 불렀는데, 샛강에서 물이 빠지고 나면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이 중 가장 큰 물웅덩이를 '잘바', 잘바 북쪽 웅덩이를 '윗여울', 남쪽을 '아랫여울'로 불렀다고 한다.
김수동씨는 "어릴 때 학교 갔다 오면 바위가 있는 큰 물웅덩이인 '잘바'에서 수영을 많이 했다"고 말했고, 유복순씨는 "샛강이 얕았을 때 떠내려 온 나무를 주워 땔감으로 쓰려고 물에 많이 들어갔는데, 물에 빠져 죽은 사고도 몇 번 있었다"고 했다.
마을에는 나루터와 장터에 대한 아련한 추억도 서려 있다. 일제시대 이전까지 오리섬 북쪽 경천교에 회상나루터, 남쪽 상주보 인근에 대비나루터와 낙양장이 있었다고 한다.
박희목(84)씨는 일제 때 철로가 생기면서 끊긴 나루터와 소금배 얘기를 전했다.
"옛날 어른들 얘기 들어보면 여기가 상주군이라. 소금배를 (대비나루에) 50척 씩 갔다 놓고, 장사꾼을 해서 짐을 육지로 져다 나르니께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있응께. 한척에 사람이 여덟 명씩이니께 그 사람들이 을매나 많아. 그래 여기 사람들하고 씨름대회를 했는 거야."
도남마을은 이제 낙동강 물길의 변화뿐 아니라 삶의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직면해있다. 산신제→교회→굴착기로 이어지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도남마을 공동체가 어떤 변화를 선택하고, 어떤 삶의 방향을 정할지 주목된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 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최화성 ▷사진 천재성 ▷지도일러스트 임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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