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良貨(양화)가 보호받는 사회

16세기 영국의 금융가 토마스 그레셤은 당시 영국의 화폐 사용 풍조를 빗대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고 했다. 당시 영국은 금화와 은화를 사용했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금은 함량이 떨어지는 화폐를 발행하자 좋은 화폐는 집에 두고, 질 낮은 화폐만 사용하는 현상을 두고 한마디 한 것이다. 단순한 비유였지만, 그 뒤 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온갖 곳에서 확대 사용될지는 그도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의 사회상을 보면 아마 그레셤은 세상에는 악화밖에 없다고 한탄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장애아를 둔 한 가장이 자살했다. 고아로 자라 특수강도죄로 6년을 복역한 그에게 일자리 찾기는 만만찮았다. 결혼 신고를 하지 않은 아내와는 장애 아들을 두었다. 일용직을 전전하다 아이를 장애인으로 등록하면 장애치료수당을 받을 수 있다 해서 동사무소를 찾았다. 그러나 부모가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이 아니라 하여 거절당했다. 그가 아이를 위해 선택한 길은 자신의 죽음이었다. 자신이 죽어야 아이가 치료수당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잠시 생각해 보면 이렇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건도 흔치 않다. 죽음을 결심하면서도 그는 홀로 남을 장애 아이 생각에 차마 실행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을 두고 담당 공무원을 탓할 수는 없다. 분명히 규정이 그랬을 것이다. 괜히 도와주려다 규정 위반으로 책임을 져야 하거나, 지원금을 노린 사기꾼에게 세금을 지급해야 하는 위험 부담도 있다. 실제로 각종 지원금 부당 수급 사례는 담당 공무원이 알아내기 불가능할 정도로 교묘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의 융통성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단체장에 충성하거나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없는 것도 만들어 낼 정도로 발휘하는 것이 공무원의 융통성이다. 그러니 쏟아지는 비난 여론에도 수천억 원을 들여 호화 청사를 만들고, 자신의 전원주택과 마을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드는 데 세금을 들인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도 융통성이다. 악화를 배제하기 위해 만든 규정이 양화를 구축하는 셈이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병무청장은 시력이나 치아, 어깨 등에 문제가 있어도 병역면제가 아니라 보충역으로 입대할 수 있도록 신체검사 규정을 바꾸겠다고 했다. 분명히 김황식 국무총리의 부동시(不同視)와 가수 MC몽이 생니를 뽑아 병역을 면제받은 것, 그리고 운동선수들이 어깨를 탈골시켜 병역을 기피하는 상투적인 수법을 겨냥한 발언이다. 하지만 악화가 만연하면 철저하게 관리 감독하고 적발해 엄하게 처벌하면 될 일이다. 악화 구축이 힘들다고 양화까지 포기하겠다는 것은 여론의 눈치만 살피는 행정편의주의 발상이다.

아무리 현실적으로 어렵고 힘들어도 지킬 것은 지키고, 보호할 것은 보호해야 사회가 지탱되는 법이다. 이 중심 축은 당연히 사회 지도층이어야 한다. 하지만 청문회가 자신 없어 국무총리 유력 후보자들이 줄줄이 포기하는 것을 보면 대외적으로 위법이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짓을 하지 않은 인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악화는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공직이나 교육계, 사정 기관 등 곳곳에 널리 퍼져 있다는 데 우리 사회의 심각성이 있다.

오히려 기대할 수 있는 쪽은 평범한 서민들이다. 이웃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못한다. 본지가 2002년 11월부터 '아름다운 함께 살기'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웃사랑'의 성금 누적액이 지난달 30억 원에 이르렀다. 이 대부분을 우리 이웃이 채웠다. 이들은 법과 멀다. 삶의 기준이 법이 아니라 도덕과 양심이기 때문이다. 법의 처벌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두려워한다. 국가와 사회가 진정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은 이들이다. 오블리주(의무)를 행하지 못하는 노블레스(사회 지도층)보다는 다른 이를 배려하고, 함께 어울려 사는 이들을 지키는 것이 먼저다. 악화 구축을 이유로 양화의 삶까지 간섭하고, 제재하는 사회는 결코 미래가 밝지 않다.

鄭知和(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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