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저당 잡힌 미래

참 별일이다.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 바쁘게 빠져나가는 데도 나날이 즐겁다는 사람이 있다. 그는 십억도 넘는 돈을 수년째 통장에 찍힌 숫자로만 구경하고 있다. 해가 갈수록 천국이라고 하니 이런 경우를 두고 무소유의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지 비우는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를 찾아갔을 때 운이 좋으면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지만 그 반대가 되는 날에는 쫄쫄 굶고 있어야 하는 극과 극의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부자가 되는 일도 가난뱅이가 되는 일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미래보다는 주어진 현재에 만족하는 삶을 산다고 했다. 이것은 손바닥을 뒤집어 앞과 뒤를 바꾸는 정도의 마음 씀씀이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범인으로서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성싶다.

그는 수년 전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온갖 수모를 다 겪었던 모양이다. 채무자는 현실을 못 이겨 세상을 떠나버렸고 보증인인 그에게 모든 책임이 넘어왔다. 그는 가족에게까지 외면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조금씩 빚을 갚아 나가고 있는데 이제 거의 다 갚아 간다며 갈수록 신이 난다고 한다.

"통장에서 돈이 솔솔 빠져나가니 점점 살맛이 납니다."

그러나 내가 잘 아는 어르신은 평생 통장에 돈을 차곡차곡 넣는 재미로 산다. 어르신의 손에 한 번 들어간 돈은 절대로 다시 나오는 법이 없다. 갑부임에도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며 살뜰히도 아껴 적은 금액이라도 생기면 통장에 소복소복 쌓는다. 월세가 들어오는 날 노인은 잔액을 확인하며 행복해 한다. 물론 나름대로 커다란 계획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더 부유한 노후를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면서 행복한 꿈을 밤낮 꾸었을 것이다.

"통장에 돈이 솔솔 들어오니 안심이 되고 살맛이 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얼마 전에 그 노인은 자는 잠결에 하늘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많은 재산은 하루아침에 의미를 잃은 채 유산이라는 새 이름을 달고 몹시도 시달리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현재에 살면서 날마다 미래에 저당 잡혀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삶은 현재에 기준을 두기보다는 항상 미래에 기준을 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다 쓰지도 못할 욕심이 마음 곳곳에 새 계좌를 개설하게 된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멈출 수 없는 불안, 그것은 끝까지 잠재우지 못할 일일지 모른다. 손바닥 앞과 뒤를 뒤집어 보는 정도의 마음 씀씀이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현재를 잘 사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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