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의 시부야에는 1926년에 개업한 '라이언'이라는 클래식 음악감상실이 있다. 80년대 한국 다방에서 볼 수 있었던 붉은 벨벳 소파와 개업 이후 별로 손댄 곳 없어 보이는 실내 장식이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한 켠에 가만히 앉아 주변을 살피면 추억의 깊이는 역사로 다가온다. 예컨대 앞 쪽에 자리하고 남몰래 수다를 떠는 연인은 '윤심덕'과 '김우진'을 떠올리게 하고, 맨 뒷자리에서 지휘연습에 열중인 남성은 '홍난파'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그들의 시대에 와 있구나!
한국에 서구음악이 들어온 것은 당연히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대체로 기생들의 교육기관인 권번에서 불려진 신민요를 시작으로 보지만 본격적인 의미의 서구음악은 '쟈스'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쟈스'는 미국에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재즈의 어원 가운데 하나이지만 한국에서의 의미는 다르다. '쟈스'는 일본에서 사용되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경우로 서구음악의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바흐나 베토벤의 음악도 당시에는 '쟈스'였고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도 '쟈스'였다. 음악감상실 라이언에서 밀회를 즐겼을 법한 '윤심덕'이 헝가리의 민족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를 발표했을 때 그것은 지금 의미의 클래식도 대중음악도 아닌 '쟈스'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홍난파가 두 번째 일본 유학에서 일시 귀국한 1928년 경성방송국에서 처음 연주한 곡도 '쟈스'였다. 참고로 홍난파는 좥나소운좦이라는 예명으로 '백마강의 추억'을 비롯해 14곡의 대중가요를 작곡하기도 했다.
당시의 쟈스는 미국의 빅밴드가 연주하던 스윙 재즈와 유럽의 사교 음악이 대체로 연주되었다. 특히 미국의 스윙 재즈는 한국의 쟈스문화를 주도하던 악극단이나 가극단의 주요 연주 목록이 되면서 193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초창기 한국 창작음악, 특히 대중음악에서는 미국풍의 재즈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1940년대가 되면서 급격히 변하게 된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이 땅의 음악방향도 변화시키는데 적성국인 미국의 음악이 금지되고 이탈리아나 독일 음악이 유행하게 된다.
이때부터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구분이 등장하게 되며 아직도 그 경계에서 음악적 혼종화(hybridization)를 체득하고 있던 음악인들은 탱고나 룸바, 차차차 같은 라틴 계열의 음악을 수용하게 된다. 시기적으로 조금 뒤의 일이지만 한국에 댄스 문화가 시작되는 것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다. 이처럼 한국대중음악의 시작은 이 땅의 문화변환(transculturation)을 상징하는 일이며 중심에는 '쟈스'가 있었다.
권오성 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