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남침, 군사분계선, 냉전시대, 서해 5도…. 이런 일련의 말들은 전후 세대들에게는 그다지 실감나지 않는다. 들어서 알고 있고 역사책에서 보았지만 감각적으로는 좀처럼 흡수되지 않는 것이다. 1960년대 생인 나도 그러니 전후 2세대인 20대 젊은이들에겐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지난 3월에 해군 초계함인 천안함이 피격되고 수십 명의 장병이 사망했을 때도 북한의 소행이 자명해 보였지만 무수한 의혹이 꼬리를 물었고 많은 젊은이들의 관심은 의혹 쪽에 더 쏠렸다. 사건의 결말이 난 지금도 여전히 한편에서는 피격의 원인을 제대로 따져 보자는 분위기가 남아있다. 그러던 차에 북한의 이번 연평도 포격은 젊은 세대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이 천안함보다 훨씬 무겁다고 할 수는 없음에도 국토의 직접적인 폭격과 민간인들의 사상으로 남북의 냉전 현실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황해도 연안에 남쪽을 겨냥하는 북한의 포신이 그토록 많았던가, 하고 놀라워한다.
프랑스 작가인 로맹 가리의 소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치명적인 사건이 한 인간에게 던져주는 끝 모를 불안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작중 인물인 글루크만은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군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죽음 직전에 탈출한 유태계 폴란드인이다. 글루크만은 독일과 멀리 떨어진 안데스 산맥의 고원지대로 도망쳐서 라마의 몰이꾼이 됨으로써 게슈타포의 손아귀를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히틀러도 몰락한 후 무려 15년이 지난 어느 날, 글루크만은 옛 친구 쇼넨바움을 만난다. 쇼넨바움은 여전히 나치에 대해서 불안에 떨고 있는 글루크만에게 전쟁은 이미 15년 전에 끝났고 나치의 친위대도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유태인이 세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있고 유엔의 회원국이라고 일러준다. 그러나 글루크만은 결코 나치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나치가 없어졌다는 것은 단지 유태인들이 노출되기를 기다리는 나치의 음모이자 함정이라고 대꾸한다. 그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수용소에서 자신을 악랄하게 괴롭혔던 한 친위대원을 숨겨주고 매일같이 음식을 갖다 바치고 있었다. 자신을 수용소로 끌고 가지 말라고, 친위대원에게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로맹 가리의 소설은 한 사건이 인간의 영혼을 무너뜨리고, 그 상처가 얼마나 오래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이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로도 읽힌다. 더 이상 억압하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체가 있다고 믿으면서, 억압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이를테면 시위를 하고 있는 보수적인 시민단체 회원들이나 손자뻘 대학생들과 말다툼을 하는 전쟁 세대에 속한 연로한 분들을 보면, 아직도 전쟁 중이라고 믿는 모양이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북한 얘기만 나오면 저렇게 얼굴을 붉히는가 싶은 것이다. 그 불안의 정체는 레드 콤플렉스일 뿐이며 오히려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양산하는 것이므로 남북 모두에 좋지 않은 것이라고 여긴다. 더 나은 경우에도, 좌파 우파를 가르고 다른 세대와의 교감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번 연평도 포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 공포의 실체가 사실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해괴하게 부풀려져 있다고 보았던 이데올로기의 저편이 실제로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핵무기를 생산하는 것에 대해서도, 3대의 부자 세습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무감각했던 전후 2세대는 눈앞에 펼쳐진 연평도의 참혹한 현장에 아연해할 수밖에 없다.
물론 북한 위협에 맞서는 남북의 첨예한 대결 구도가 전후 2세대에까지 전달되는 것은 부자 세습만큼 적절치 않은 일임은 자명하다. 위협도 종식이 돼야 하고 전쟁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같이 모두가 평화를 기대하는 와중에 터진 연평도 포격 사건은, 기성세대가 갖는 끝나지 않은 공포감을 새로운 세대에게 이해시키면서 그들로 하여금 남북관계를 거론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북의 현실을 제대로 살피는 점이 기초적인 사안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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