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대구 화단에는 화가이자 또한 지식인으로서 다방면의 활약을 보인 재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이 그림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것은 시대와 역사의 격랑이 너무 높고 험난했던 탓이라고 해야 할지. 근원 김용준은 '생각나는 화우들'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대구 있을 때 사귄 화우로서는 서동진, 최화수, 박명조 등 제형이 있었는데 최 형은 그림보다 문학에 더 조예가 깊어서 한때 세평이 좋은 소설까지 발표하였으나 무슨 이유론지 그는 그림을 더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다난한 세파는 우리들의 지향하는 바를 순수히 길러 주지 못하여 최 형은 생활을 위하여 전전하다가 지금은 군수(郡守)살이를 한다는 소문이 들리고 서 형 역시 들은 바에 의하면 그림보다는 장사에 더 힘을 기울이게 되는 모양이며 박 형은 지금쯤 화필을 놓지나 않았는지 소식이 격조하다."
근원이 이 글을 쓸 즈음, 최화수는 달성군수(1946년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를 지냈다. 그는 일찍이 명치대학 문학부를 수료하고 대구의전에서 해부학까지 공부한 이력을 지녀 중국 근대화 운동의 선구자 루쉰 같은 면모가 연상된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에 참여한 사상가로서도 닮은 데가 있다. 해방 후 정치 사회활동의 일선에 있다가 6'25때 납북된 이래 생사를 모른다.
화가로서 그의 활동은 문예운동 단체인 영과회와 향토회의 중심 회원이었다는 것과 여섯 번에 걸쳐 조선미전에 입선한 사실 외에는 더 알려진 것이 없다. 작품은 주로 대구 근교의 풍경과 인물과 정물 등을 소재로 그렸음을 흑백 도판을 통해 겨우 짐작할 뿐이다. 김용준 서동진 등과 함께 어울려 찍은 사진들 속에서 나비 넥타이를 맨 양복 차림이거나 두루마기를 갖춰 입은 모습으로 눈에 띄는데 당시 대구 문화계의 총아로 불렸다는 그들의 관계와 활약상을 증언해 준다.
문단에 대한 관심은 1926년 11월 2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민중과 예술'이란 글에서 확인된다. "가장 정밀하고 주도한 관찰력으로써 민중 생활을 응시하고 민중의 희, 비, 애, 락을 표현하여야" 한다며 민중을 떠난 예술은 생각할 수 없다는 문학관을 폈는데, 그 진정성은 회화에서도 공명된다. 당시 대구서는 드물게 유화로 제작한 이 작은 그림을 보면, 명암의 대비가 뚜렷한 밝은 빛의 색채에서 대상을 향한 시선의 따스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배경의 녹색은 배음 효과를 고조시켜 약간 무거운 톤의 조화를 발생시킨다. 두텁게 칠한 붓질에 의해 형성된 마티에르에서 한층 농후하게 질박한 정서의 개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김영동(미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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