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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의 시와 함께] 깊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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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 커피 뽑는 것도 시비꺼리가 될 수 있는지, 종이컵 속 커피 위에 뜬 거품을 걷어내면 "왜 거품을 걷어내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나는 "커피의 깊이를 보기 위하여"라고 대답한다. 마음에 없는 말 일수 있다. 인스턴트커피에 무슨 근사한 깊이가 있느냐고 물으면, 대단치 않는 깊이에도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해 준다. 모두 얕다. 기실 따뜻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대단찮은 깊이까지 사랑한다 해도, 커피는 어두워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실 어둠의 깊이를 얕볼 수 없다. 싸고 만만한 커피지만, 내 손이 받쳐 든 보이지 않는 그 깊이를 은밀하게 캐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걸 누가 쉬이 들여다볼 수 있단 말인가?

이 하 석

믹스 커피는 단연 국산이 최고. 해외여행 갈 때도 너나없이 필수품으로 챙겨들 간다. 하루에도 예닐곱 잔씩 자판기커피 마시는 사람이 말했다. 자꾸 마시다 보니 정이 들어 끊지 못하겠다고, 꼭 애인 같다고. 맞는 말이다. 잠시 휴식할 때나 무료해서 막간을 채워야 할 때 그 커피만한 게 있더냐. 언제나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 애인. 추운 겨울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게 손까지 데워주니.

그러나 그 커피에도 깊이가 있고, 밑바닥까지 다 보여주지 않는 어둠이 있다. 만만하다고 얕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잘못 건드려 엎질렀을 때, 잘 차려입은 양복이 온통 얼룩지는 건 물론 소매 안에 덴 팔뚝은 벌겋게 부풀어 오르니. 이렇게 복병은 늘 가까이 사소한 곳에 포진해 있다. 대단치 않은 것에도 빠질 수 있다는 말에 유의하자.

커피 한 잔의 사유가 참으로 치밀하고 검고 또 깊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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