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창석의 뉴스 갈라보기] 양파껍질 같은 인종 문제

#양파껍질 같은 인종 문제/엄창석 소설가

이번 아시안컵 축구대회 한일전에서 기성용 선수가 연출한 원숭이 세레모니는 인종 갈등에 대한 여러 현상을 잡화점식으로 열거해 놓은 것 같다. 기성용은 페널티킥을 성공한 뒤 누가 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손으로 뺨을 긁는 원숭이 특유의 흉내를 내어서 국내외에 격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을 비하한 거냐, 민족의식을 드러낸 거냐 하는 식의 논란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닷새 뒤에 열린 일본과 호주의 결승전에서 막판 결승골을 터뜨린 이가 얼마 전까지 한국인인, 일본 대표팀의 이충성 선수였다. 재일동포 4세인 이충성은 예전에 한국의 청소년대표팀에 소집되었으나 동료들에게서 '반쪽짜리'라는 멸시를 당하고는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들여다보자면, 기성용 선수는 현재 스코틀랜드의 프로축구 클럽인 셀틱 FC에서 뛰고 있는데 경기 중에 관중들로부터 '원숭이 야유'를 받았다는 것이다. 백인들이 아시아인들을 야유할 때 원숭이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모양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기성용은 자신이 당한 같은 방식으로 상대가 아닌 일본에 야유를 보낸 것이다.

괴이쩍은 건 기성용만이 아니다. 그가 활동하고 있는 스코틀랜드가 그렇다. 스코틀랜드가 어떤 곳인가? 앵글로색슨 족으로부터 침탈과 억압을 받아온 켈트족이 모여 사는 지역이 아닌가. 자신들이 거주지를 빼앗긴 5세기 이후로 수많은 독립전쟁을 치렀고 그때마다 쓰라린 패배를 안았으며, 그것이 아스라한 비극적인 시(詩)가 되어서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고 있는 곳이 바로 스코틀랜드이다. 그래서 멜 깁슨의 '브레이브 하트'나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같은 슬프기 짝이 없는 독립전쟁 영화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앵글로색슨 족으로부터 억압과 차별의 슬픔을 안고 있는 스코틀랜드인들이 기성용에게 다시 인종적인 야유를 보냈다니!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이충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 청소년대표팀의 소집 명령에 얼른 달려온, 조국애가 유별났던 이충성에게 '반쪽짜리'라고 동료들이 멸시한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인류가 겪는 세 종류의 근본적인 갈등이 종교와 언어와 인종이라면, 그 중 인종 갈등이 가장 납득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어떤 큼지막한 역사적 사건에서 1차적인 갈등이 시작된 후, 이중 차별, 역차별, 다중 차별 등 무수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서 이제 완전히 소멸되었다 싶을 때도 도리어 일상에서는 아주 사소한 데까지 흔적이 남아 당사자를 더 깊은 고통에 빠뜨린다. 이것은 외견상 너무 미미해서 당사자가 아니고는 도저히 감지할 수조차 없다.

나도 인종 차별의 상흔이 얼마나 예리하고 깊은지 알지 못한다. 최근 보도로 추측해 보면 오바마 미 대통령마저 인종적 자의식에서 풀려나지 못한 것 같다. 2010년 인구센서스에서 인종을 묻는 질문에 '블랙'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가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면 당연히 '화이트'와 '블랙'이라고 표기해야 옳지만 과거에 박힌 상처 때문인지 '화이트'에 손이 가지 않았다. 미국의 인구조사는 두 개 이상의 인종 항목에 표기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현재 미국은 전체 인구의 약 35%가 혼혈이라고 한다. 한 히스패닉 센터의 인구학자는 2010년 통계가 발표되면 미국 사회는 상당한 충격을 받을 거라면서 과거 자신이 혼혈임을 부끄러워했던 감정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이 말은 미국에서 인종 갈등의 벽이 무너지는 것은 백인과 흑인과 아시아인 등이 서로 결혼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는 셈이다.

인종 간의 갈등은 이토록 어려운 문제다. 바꾸어 생각하면 원숭이 흉내를 낸 기성용 선수나 원숭이 야유를 보낸 스코틀랜드인들을 비난하기 힘들다. 야유의 깊은 곳에는 지난날의 역사가 가르쳐준 준엄한 의식이 존재할 수도 있다. 오히려 이들을 쉽게 비난해서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런 비난은, 인종 간의 갈등을 단순히 개인의 불의(不義) 탓으로 돌림으로써, 인종 갈등을 유발시키는 세계의 제 문제를 망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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