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할머니 집과 대통령 집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뭔가를 열심히 굴리며 가고 있다. 한 발짝씩 힘겹게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혼잣말을 하신다.

'굴러라, 굴러라, 가자, 집으로 가자.'

둥근 호박이었다. 집 뒤 언덕허리에 심어 놓은 호박을 따다 집으로 가져가시는 길이다.

답삭 들고 가면 딱 맞을 크기인데도 땅바닥 위에 힘겹게 굴리며 가고 있었다. 꼬부라진 허리도 허리지만 익은 호박 하나조차 들 기력이 없는 팔순이란 나이 탓이리라. 저녁 반찬거리를 위해 몇십 미터도 안 되는 호박밭 길을 내내 두 손으로 굴리며 오셨다. '굴러라 가자, 집으로 가자'를 열 번도 더 되뇌며….

설 다음날 어느 TV 방송이 노인 분들만 사시는 한 시골 마을의 삶을 8년 동안 찍어서 편집한 다큐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

8년간 한 분 두 분 상여를 타고 마을을 떠날 동안 찍은 화면 속에서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분들이 평생을 살아온 낡은 집들의 모습이었다. 예전의 싱크대는 어느덧 굽어진 허리 앞에 너무 높아 버린 집, 할머니는 손바닥으로 굴려서 갖고 온 호박을 방바닥에 놓고 썰어야 했다. 그럴망정 먹고살기 바쁜 객지의 자식들에게 싱크대 높이를 굽은 허리에 맞게 고쳐 달라고 할 어머니는 이 세상에 없다. 언제 이 한 몸 떠나면 비게 될지 모를 낡은 시골집을 큰돈 들여 고치고 짓는 데 자식 주머니를 털게 할 부모는 없기 때문이다. 그날 TV에도 집 고치는 기록 장면은 물론 없었다.

설 연휴, 3천여만 명의 귀향객들이 고향을 오갔다. 대부분 어릴 때 자신이 태어났거나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이 살아계신 시골집을 찾았을 것이다. 개중엔 아직도 아궁이에 불을 때고, 굽은 허리 높이보다 높아진 낡은 싱크대에다 가끔은 벽지가 젖어드는 집들도 있을 것이다. 고칠 만한 데가 있어도 '아무 일 없다'고 하셨을 테고 고쳐 드리겠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 손사래를 치셨을 것이다. 할머니의 옛집들은 또 그렇게 해서 내년까지 한 해 더 낡은 모습으로 버틸 것이다. 누구나 그런저런 낡은 시골집들의 사연을 지녔다. 그게 보통 사람들의 집 이야기다.

설을 보내며 지난 연말부터 시비가 일고 있는 대통령들의 집 이야기를 비교해 보게 된다. 우선 이명박 대통령 사저(私邸) 경호 시설비 예산으로 100억 원이 신청됐다가 40억 원이 깎인 얘기부터 보자. 민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건립 때 '아방궁' '노방궁'이라 비판했던 여당이 MB 사저 경호 시설에는 27배나 더 많은 예산을 요구했다며 비난했다. 대통령실은 MB 사저는 30년이 넘은 100평 크기 집으로 노무현 사저(387평)보다 작고 70억 원은 전직 대통령 예우 관련법에 따라 지어야 하는 경호 시설의 부지 매입 대금으로 평당 3천만 원이 넘는 서울 땅값과 봉하마을 농촌 땅값과 단순 비교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체력단련실 같은 걸 줄이면 예산을 조금이라도 아낄 수는 있다.

'노무현 재단'은 한 술 더 떴다. 지난해 말 봉하마을에 사저 외에도 '노무현 기념관'을 짓고 서울에는 '노무현 센터'를 만들겠다며 600억 원 중 180억 원은 국고 지원을 요구했다, 55억 원은 이미 예산 편성까지 따냈다고 한다. 이런저런 대통령 이름이 붙은 집과 건물들이 국민 세금을 보태 세워지고 있는 셈이다. 즉각 인터넷에는 국고를 보태라는 요구에 대해 '놀고 있다'는 비아냥이 떴다. 반대쪽 인터넷에는 '이명박 ㅋㅋ'가 뜨고….

대통령들의 집 지어주자는 얘기라면 비방 대신 국민들의 박수가 나와야 제대로 된 나라일 텐데 왜 박수는 적고 비아냥이 나왔을까? 호박을 굴려서 가는 할머니 집도 맘먹고 고쳐줄 형편이 못 되는 평민들로서는 과연 세금으로 큰 집 지어 줄 만큼 추앙받은 대통령이었느냐는 의문이 들면 박수를 치지 않는다. 참고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울 사저는 노무현 전 대통령 신축 사저의 10분지 1도 안 되는 32평짜리 단층이다. 관리비도 육영수 기념사업회가 스스로 맡아 낸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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